가장 낯설고 불안한 시공간 속에서 타인을 바라보기
이 글은 다양한 이유로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던 나의 삶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기록이기 때문이다. 나와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없겠지만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혹은 병원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 글을 이해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우리는 결국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생의 시작과 끝을 병원과 함께 한다. 나도 평범하게도 지방의 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났고, 평균보다는 조금 더 병원과 인연이 있는 모양인지 일곱 살 꼬맹이 시절부터 병원을 자주 왔다 갔다 했다. 내가 아픈 건 아니었고 아빠가 아팠다. 뇌종양 진단 후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한 곳에서 한동안 머물르며 수술도 하고 입원 치료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다른 대형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셨다. 16년이 지나고 나는 그 병원에 의료진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환자나 보호자로 병원에 오는 것과 의료진으로 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3년 넘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출퇴근하며 다양한 경험을 마주했다.
내 근무지는 암센터였다. 나는 항상 후문으로 출퇴근했는데, 후문에 서면 바로 왼쪽에는 장례식장이 보였고 그 바로 앞에 암센터 건물이 자리했다. 누군가는 이 배치를 당연하고 평범하게, 혹은 더 나아가 효율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괜스레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죽음이 우리 옆에 있는 것처럼, 혹은 일상의 한 부분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질병과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병원에 오면 그 사실을 재차 확인받는 기분이 든다. 이런 복잡하고 미묘한 공간에서 우리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마구 섞여 휘몰아치는 느낌을 받는다. 그 중심에 '불안'이 있다.
불안이 얼마나 강렬한지는 사실 겪어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나 역시 그랬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상황을 하나 가정해보기로 한다.
당신은 어떠한 이유로 병원에 갈 일이 생겼다. 그 이유란 썩 좋지 않은 것일 확률이 다분하다. 특히 병상수가 수백, 수천에 이르는 상급종합병원이라면 더 그렇다. 감기나 발목 접질림과 같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이유로 대형 병원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작은 규모의 병원에서, "정밀 검진이 필요하니 큰 병원에 가보세요."라는 말을 먼저 듣고 온다. 증상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단 정확한 진단을 모르는 그 상황만으로도 당신은 불안하다. 그 '진단'의 대상은 본인일 수도 있고, 혹은 사랑하는 가족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나 마음이 힘든 것은 매한가지다. (심지어 증상이 있다면, 몸과 마음이 동시에 괴롭기 때문에 배로 힘들다.) 이 단계에선 질병 그 자체가 평균적으로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갖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불안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요인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기다림'이다.
병원을 가려고 준비하는 단계부터 당신은 기다림을 마주한다. 특히 규모가 크고 유명한 병원일수록 더 많은 기다림의 단계가 있다. 일단 진료를 보려면 외래 진료 예약을 해야 한다. 병원 홈페이지에 공개된 번호로 전화를 걸면, 받기까지도 한참이다.(진료 예약 한번 하려고 전화를 수 차례 해야 했다는 이야기를 근무하면서 자주 듣는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다른 방법으로 예약을 받는 병원도 생겨났다.) 아마 당신은 병원에 전화하기 전에 꼼꼼한 검색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본인의 증상, 관련한 질병, 치료법, 그리고 유명한 의료진까지. 겨우 전화가 연결이 되면, 많은 서치 끝에 찾았던 '유명한' 의료진 예약을 하려면 삼주 이상(과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길게는 몇 달까지 걸릴 수도 있다.) 걸린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떨어진다. 일주일 내에 빠른 진료가 가능한 다른 의료진에게 진료를 받을지 혹은 긴 기다림을 감내하고 미리 점찍어둔 의료진에게 진료를 받을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힘겹게 결정을 내린다. 또다시 기다림이 시작된다. 만약 당신 혹은 당신의 가족에게 의심되는 질병이 암(혹은 다른 난치병)이라면, 그 기간은 체감상 훨씬 더 길어진다. 현대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암(혹은 다른 난치병)'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암을 여전히 '불치병' 혹은 심각한 난치병으로 생각한다. 즉, 암을 진단받으면 죽음과 연결 지어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어떤 사람은 불안감을 이겨내려 본인의 증상과 질병에 대해 검색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좋지 않은 예후와 힘든 치료과정이 눈에 들어온다. 불안은 그렇게 빠르게 몸집을 키운다. 그렇게 기다림은 더욱 견디기 어려워진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병원에 발을 디뎠다고 하자. 당신은 예약 시간에 맞춰서 혹은 그보다 일찍 병원에 도착한다. 번호표를 뽑고, 당신의 이름이 불릴 때까지 기다리고, 접수를 하고, 간단한 문진표를 작성한다. 그리고 대기석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주변에 종종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문득 본인의 미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 진료를 상상해본다. "별 거 아니네요. 치료는 금방 끝날 것 같네요."라던가, 혹은 "더 정밀한 검사가 필요할 것 같네요."일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수술이 필요합니다."같은 말이면 어떡하지? 어쩌면 그것보다 심각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잡다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다가 문득 예약 시간이 지난 것을 확인한다. 분명 예약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당신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접수하는 곳으로 가서 물어본다. 그저 기다리라는 답변이 온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상급종합병원에선 미리 예약을 해도 그 시간에 정확히 맞추어 들어가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렇기에 병원을 자주 이용해본 누군가는 예약을 해놓고 아예 외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오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기다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방문하는 환자 수에 비해 의사의 수는 월등히 적으니 시간을 쪼개어 외래를 빡빡하게 잡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힘겹게 당신은 첫 진료를 보게 된다. 기다림이 허무할 정도로 진료는 빨리 끝난다. 살짝 훔쳐본 의사의 모니터에는 알 수 없는 영단어들이 잔뜩 나열되어 있다. 긴 내용 같지만 의사는 짧고 간단하게 설명한다. 궁금하지만 물어볼 정신이 없다. 진료실을 나와 안내받은 대로 원무과로 가서 또 번호표를 뽑는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후회의 감정이 밀려온다. 묻고 싶었던 질문들을 하나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기다리다가 차례가 되면 수납한다. 드디어 첫 외래 진료가 끝이 났다.
이건 그래도 덜 기다리는 편이다. 진료 중간에 검사가 추가되는 경우도 잦다. 그렇게 되면 기다림은 배로 늘어나게 된다. (물론 이건 코로나가 발생하기 이전의 이야기다. 지금은 이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기다릴 일이 많다.) 외래 진료가 이 정도인데, 만에 하나, 암과 같은 난치병을 진단받고 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바싹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암센터 의료진으로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 사수에게 가장 처음으로 받은 지적은 너무 밝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그게 왜 문제가 될까 싶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인간은 불안해한다. 다른 공간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느껴진다. 다수의 병원이 환자나 보호자에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인간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무서워한다. 전문 의료인이 아닌 이상, 환자나 보호자로서 병원에 오게 되면 본인에게 발생한 사건의 처음과 끝을 전부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모든 맥락과 인과관계가 불확실해 보인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람은 쉽게 부정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예민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갈등이 빈번해진다. 어떤 의료인은 이런 부분을 섬세하게 고려하면서 환자를 돌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나는 병원에서 종종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관계가 극에 달하여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보일 때면 그 사실이 안타까워서 견디기 어려웠다. 갈등 상황에서는 서로의 간극이 도저히 메꾸지 못할 것처럼 크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사실 딱 한 걸음만 물러서 보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지금 내가 병원에서 다양한 포지션에 위치하며 느꼈던 것들을 글로써 풀어나가고 싶은 이유이다.
의료진의 행동을 보며 "왜 저럴까?"하고 한 번쯤은 생각해본 적 있을 것이다. 치료 과정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혹은 마음이 닫혀있었을 수도 있다. 반대로 매일 반복되는 바쁜 일상에 매몰된 어떤 의료진은 환자가 겪는 어려움을 무심하게 지나쳤을 수도 있다. 그 사이에 간과된 사실이 하나 있다. 애초에 의료진은 환자를 위해 존재하고, 환자가 그런 의료진에게 신뢰를 가져야만 적절한 치료과정이 순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를 위해 존재하지만 우리는 매번 갈등 상황에 빠진다. 아주 작은 간극만 메꾸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항상 그렇게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그 틈을 차곡차곡 메꿀 수 있는 서로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전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직접 겪은 일이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가 겪었을 이야기이기도 하며, 나중에 또 다른 누군가가 겪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병원에는 10년, 20년 이상 같은 일을 한 대단한 경력의 인재도 많고, 똑똑한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이 넘쳐난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타인의 말과 행동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 편이고, 생각이 많아서 항상 기록하는 습관을 갖고 있으며, 무엇보다 '사람' 그 자체에 대한 믿음이 마음 한가운데에 굳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결국 생에 한번 이상 병원을 가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이미 매일같이 병원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은 처음으로 병원에 가기 위해 준비하며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필요한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었으면, 불안한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게 이 글에 녹아있는 나의 바람이다. 고된 시공간 속에서 끝없는 기다림과 불안감을 견뎌내는 누군가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길 바라며, 첫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