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반지, 그 미친 짓에 대해
50살이 겨우 되어 돌아가신 엄마의 손가락엔 낡은 진주반지가 늘 끼워져 있었다.
진주 한 알이 심플하게 세팅되어 있는 반지는 엄마의 유일한 장신구였다. 엄마는 그 반지를 끼고 양푼의 쌀과 보리쌀을 빡빡 문질러 씻었다. 그 덕에 진주알 옆이 밥을 해대던 세월만큼 닳아져 있었다. 해외근무를 자주 하셨던 아버지가 귀국하면서 사다 준 금 목걸이나 다이야 반지는 돈이 궁할 때마다 현금으로 바뀌는 운명이었지만 찌그러진 모양의 진주반지는 한결같이 소박한 우리 엄마의 약지에 끼워져 있었다.
내 약지엔 두 개의 외줄 금반지가 끼워져 있다.
하나는 결혼반지이고 하나는 묵주반지이다. 내가 처음 종교에 귀의했을 때 큰언니는 자신의 검지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묵주반지를 빼서 나에게 주었다. 몇 년 전부터 기도생활에 게을러진 나는 검지에 끼워진 묵주반지가 조금 걸리적거렸다. 그래서 손가락에 딱 맞는 결혼반지 안쪽에 조금 헐거운 묵주반지를 끼고 마치 쌍가락지인 듯 끼고 다닌다. 기도생활은 소홀히 할지언정 돌아가신 큰언니가 주신 믿음의 징표를 손가락에서 빼서는 안 될 것 같아서다.
결혼반지도 사실 첫 번째 것이 아니다. 세월과 함께 손가락이 굵어져버린 우리 둘은 결혼 10주년을 기해 각각 큰 사이즈의 똑같이 생긴 새 반지를 맞추었다. 그렇게 20여 년이 지나 중년이 된 내 손가락엔 퇴행성 관절염이 찾아왔고 남편의 손마디도 더 굵어져 버렸다. 꽉 끼어 잘 빠지지 않는 반지는 많이 불편했고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반지를 빼놓는 때가 많아졌다. 어느 날 함께 빼놓은 반지 두 개를 쳐다보다가 남편의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아, 이런, 딱 맞네!, 그때부터 내 왼손의 약지엔 남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결혼반지와 묵주반지가 사이좋게 나란히 끼워져 있다.
어느 날, 손톱을 깎은 뒤 로션을 바른 두 손을 펼친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이에비해 일찍 찾아온 퇴행성 관절염으로 마디마디가 굵어져 있고 구부러져있는 손가락의 모양과 거칠어진 손등에 왠지 마음이 울컥해졌다.
내 몸 가운데에서 내가 가장 우아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손.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법 매혹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나의 손. 젊은 한때는 투명한 핑크색의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던 다듬어진 손톱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구부러진 채 굵은 마디 때문에 결혼반지조차 낄 수 없는 손이 되어버린 나의 손.
손등의 호박죽 끓이다 덴 자국이, 걸핏하면 실크 머플러에 스크래치를 내는 거친 손가락 끝이 그 순간 내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고 말았다.
그때 마음먹었다.
이 상처투성이의 손에 아름다운 반지를 끼워줘야겠구나 하고.
무슨 반지로 할까?
생각해 보니 빨간색의 루비도 좋겠고, 초록색의 에메랄드나 파란 사파이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이왕 살 거 반짝반짝 다이아몬드로 할까?, 아니면 엄마처럼 진주반지로 할까?
한번 마음을 먹으니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 살면서 나 스스로 사본적도 없거니와 남편 역시 결혼 전 칠보 은반지 세트를 한번 선물했을 뿐 보석반지 같은 사치품은 우리 인생에 등장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처음엔 "갑자기 웬 반지?" 하면서 뜨악해하던 남편도 곰곰 생각하더니 나보다 더 열심히 인터넷 서치를 한다.
그렇게 해서 구입한 Diamond 반지!, 그것도 무려 1캐럿짜리로 사버렸다.
내가 나이 들더니 미쳐가는 것이 아니냐고? 그럴 리가.
내가 산 것은 Lab Grown Diamond이다.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이 캐낸 피눈물어린 다이아몬드가 아닌 몇백 불짜리 인조 다이아몬드다.
그래도 같은 분자구조를 가진 엄연한 다이아몬드라니 반짝거림은 같을 것이다.
그동안 손가락 굵어지고 휘어도록 열심히 살았구나 칭찬하며 나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덜렁대다 반지 크기를 잘못 지정하는 바람에 다시 리턴하고 보름 뒤에나 받을 반지이지만 기분이 썩 좋다.
백 불 이상의 선물을 스스로에게 해본 적이 없는 내게 몇백 불짜리 선물을 하는 내 변화가 썩 마음에 든다.
"이 반지, 내가 당신에게 선물하는 거야."라며 나보다 더 신나 하던 남편의 공감과 협조도 고맙다.
다음 달에나 배달될 반지는 오른손잡이인 나의 왼손보다 더 망가진 오른손 약지에 끼워질 것이다.
그리고 엄마처럼 앞으로도 계속 나는 그 손으로 빡빡 쌀 씻어 밥 안치고 행주를 빨것이다.
엄마의 진주반지처럼 닳지는 않겠지만 나의 흰 머리카락이 느는만큼 반지의 반짝임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다가 미래의 어느날엔가 내딸이, 또는 내 손녀가 "그거 나에게 물려주세요."라고 할 때까지 내 손가락에 지니고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