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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시은 Jan 05. 2021

아빠가 끝내 하지 못한 말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내가 스물둘 되던 해였다.

긴 머리에 롱스커트 입은 가녀린 여자가 이상형이었던 나에게 짧은 웨이브 머리에 흰색 나팔바지를 입은 그녀가 왜 그리도 예뻐 보였는지 모르겠다.

부산이 집이었던 그녀의 화려한 스타일은 전라도가 고향인 보수적인 내 눈에는 다른 나라 사람에 가까웠다.

그때 그녀에게 반하지 말았어야 했다

몇 달의 구애 끝에 그녀는 마음을 열어줬고 그렇게 일 년쯤 사랑을 키워 가다가 우리는 작게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눈 깜짝할 세에 둘째가 태어나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아이 셋 아빠가 돼있었다.

열심히 살지 않아도 부모님의 지원으로 큰 고생 안 하고 살았던 나였다.

집안의 장남이자 장손이었던 나는 동생과 누나들 사이에서 신 같은 존재였다.

그런 내가 이젠 그냥 그렇게 살면 안 됐다.

아이들은 자꾸만 커가고 나는 집안의 든든한 가장이 되어야 했으니까.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의사가 정밀검사가 필요하단다.

뭐지? 난 건강한데...

그때 여러 가지 검사 끝에 나는 위암 초기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아주 초기였고 운이 좋게도 수술 후 예후도 좋았다.

그런데 내가 예전과 다르게 짜증이 늘었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게 화가 났다.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이 생긴 건지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수술 후 회복을 해야 해서 일을 할 수가 없었는데 아이들은 커가니 마음이 답답했다.

그녀가 고민 끝에 큰애 작은애도 이제 학교에 다니니 본인이 일을 하겠다고 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나를 위한 배려였다.

그때 나는 그녀를 배려했어야 했다

그녀가 출근길에 사고를 당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나를 남겨 두고 그녀는 혼자서 먼길을  떠났다.

스물한 살에 시집와서 아이 셋 낳고 키우느라 손에 물 마를 날이 없던 가엾은 그녀는 서른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나 만나서 고생 하다가게 해서 미안했네. 거기서는 편하게 쉬면 좋겠네.

그때 내 나이 서른셋이었다.


사고 보상금이 88년도 당시 3억 가까이 나왔다.

아내를 잃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어머니께 아이들을 맡기고 지인들을 만나서 사업 구상도 하고 땅도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혼자서 아이 넷을 키우며 길거리에서 분식 노점상을 하고 있었다.

힘들게 살아가는 그녀를 보는데 왜 먼저 간 아내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아내에게 미안한 죄책감이 자꾸 그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때 나는 그녀를 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다.

아내는 꽃을 참 좋아하던 소녀 같은 여자였다.

그런데 9년을 살면서 꽃 선물 한번 해준 적이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그녀에게 자주 꽃을 선물했다.

그녀가 꽃을 보며 웃자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나아졌다.

우리 집 화단에는 아내가 심어 놓은 해바라기며 봉숭아 꽃, 맨드라미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했는데 아내가 떠나고 나는 그 꽃들을 다 뽑아서 버렸다.

꽃을 보면 아내 생각이 났는데 그 기억 속에 나는 늘 나쁜 남편이었다. 그게 싫었다.

그때 나는 꽃밭을 다 망가뜨리지 말고 아내 대신 그 꽃들을 잘 살펴 주었어야 했다.

노점상을 하는 그녀에게 작은 분식점을 차려 주었다.

길에서 고생하는 게 안쓰러웠는데 가게가 생기니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께 내 아이들을 맡겨두고 그녀의 네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그녀를 내 주위 모든 사람이 싫어했다.

어머니는 내게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녀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남의 새끼 거둬 먹일 때 니 새끼들은 눈에 밝히지 않느냐고 호통을 치시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집을 나왔다.

나는 그때 내 아이들을 챙겼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아이들은 아직 어렸고 내가 가진돈의 대부분은 그녀와 가게를 차리거나 대출을 잘못 서주고 날린 후였다.

아이들과 살아갈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혔다.

친구와 술 한잔 하면서 신세한탄을 하고 나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를 사서 집으로 갔다.

그날따라 아이들이 그 과자를 두고 계속 싸우기 시작했다.

별일 아니었는데 나는 갑자기 사는 게 두려워져서 번개탄을 가지고 아이들이 싸우고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냥 죽자! 우리 그냥 다 같이 죽어 버리자!"

아이들이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다.

다시는 안 그런다고 두 손바닥을 싹싹 빌었다.

빌어야 할 사람은 너희가 아니고 나였는데..

나는 너희를 볼 면목이 없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그때 나는 너희를 안고 미안하다고 아빠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했어야 했다.

그렇게 집을 나온 후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너희를 볼 자신이 없었다.

너희를 보면 내가 보여서...

나의 민낯이 보여서 두려웠다.

너희는 나의 과거이자 현실이고 미래이기 때문이었다.

현실이 두려워 자꾸만 너희와 멀어져 갔다.

그때 나는 용기를 내서 너희와 험난한 세상을 함께 헤쳐나갔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러갔고,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망할 당뇨병이 집안 내력이었다.

당뇨 합병증에 여기저기 아팠고, 어느 날 병원에서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소견서를 써줬다.

내가 췌장암이란다.

뭐 이런 거지 같은 일이 다 있나 싶었다.

그 순간 나는 왜 먼저 간 아내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 대 물어 불을 붙였다.

"임자, 내가 우리 애들 안 돌보고 이렇게 한심하게 살았다고 자네 지금 나 벌주는가...?"

눈물이 났다.

아이들을 두고 편히 눈을 못 감았을 아내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내 아이들을 잘 키워내야 했는데... 지나 온 모든 순간들이 후회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나는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나 몰라라 하면서 살다가 병들자 찾아온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염치없는 인간이 되었다.

그때 나는 보고 싶어도 참고 너희를 찾지 말았어야 했다

너희는 어느덧 훌쩍 자라서 화장도 하고 술도 마시는 성인이 돼있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너무 미안해서 입 밖으로 그 말이 뱉어지지가 않았다.

너희도 외국 어디 저 멀리 갔다가 돌아온 아빠를 대하듯 살갑게 대해주었다.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나였기에 너희를 내 눈에 많이 담아두고 싶었다.

그때 나는 너희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를 했어야 했다. 그렇게 대충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면 안 되는 거였다.

둘째가 오늘 결혼을 한다.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잘 커서 결혼하는 아이 손을 잡고 입장을 하는데 눈치 없이 자꾸 눈물이 난다.

네가 태어나고 처음 너를 안았을 때 내손을 꽉 쥐던 그때처럼 너는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걸어 나간다.

그때... 막막했지만 이렇게 손 꼭 붙들고 너희와 함께 헤쳐가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임자 생각이 자꾸 나는 게 나 임자 곁으로 갈 때가 가까워지나 보오.'

그 후로 췌장암 수술을 받고 경과가 나쁘지 않아서 나는 조금 더 너희를 볼 수 있었다.

너희 어릴 때 실컷 볼 수 있을 때.. 그때 많이 봐 둘 것을...


결혼 한 둘째가 아이를 낳았다.

엄마도 없이 너는 씩씩하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다.

새벽 내내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고 달래고 먹이고 재우느라 너는 수척해졌다.

너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렇게 아이를 위해 너를 희생하면서 아이를 보살폈다.

그런 너를 보면서 젊은 시절 두려움에 도망쳐버린 에게 화가 났다.

'미련한 놈, 어리석은 놈, 한심한 놈.'


이제 정말 아내 곁으로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자꾸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너희도 알아보기가 힘들다.

어? 아는 얼굴이다.

이 놈은 내 딸을 훔쳐간 도둑놈이다.

고집이 세서 내 딸 고생시키게 생긴 얄미운 녀석.

그 녀석의 손을 잡고 힘들게 입을 떼었다.

"잘 부탁... 하네. 우리 딸 잘... 부탁해. 마음고생시키지 말고 웬만하면 져주면서 살아.  아빠 잘못 만나서 마음고생 많이 하면서 살았으니 결혼하고서라도 마음고생 안 하고 살면 좋겠네."

"예. 아버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져주면서 살겠습니다."

그걸로 됐다.

사위의 대답을 들었으니 되었다.

그 대답을 들으니 온 몸에 힘이 빠진다.


아빠가 미안하다.
아빠가 용기가 없어서 제대로 용서도 못 빌었다.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
그만 울어라. 머리 아프다.
해준 게 없어서 너무 미안하다.
너희의 기억 속에 행복한 추억 하나 만들어주지 못한 못난 아빠라서 너무 미안하다.
행여나 다음 생이 있어서 또 환생하게 되거든, 그때도 꼭 내 자식으로 태어나주렴.
아빠가 이번에 못해준 거.
잘못했던 거.
다 갚으면서 살게.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놀이동산도 가고 외식도 하고.
장난감 가게 가서 갖고 싶은 장난감도 고르자.
그 흔한 장난감 한 번을 사준 기억이 없다.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외롭게 자라게 해서. 아빠가 정말 미안해.

난 이제 너희 엄마한테 혼나러 가야겠다.

처음에 왜 반해서 쫓아다녔냐고.
왜 일한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느냐고.
왜 다른 여자 마음에 품었느냐고.
왜 자기 꽃밭 망가뜨렸느냐고.
왜 애들 손 놔 버렸냐고.
왜 잘 못 해놓고 용서를 빌지 않았느냐고.
너희 엄마 엄청 잔소리하겠다.

후회 투성이인 내 삶에 그래도 한 세상 아빠라고 불러주는 너희가 있어서.
나 떠난 뒤 아프게 슬퍼하는 너희가 있어서.
아빠는 참 행복했다.

아빠. 그거 모르지? 우리 놀이동산은 아니지만.

예전에 딱 한번 덕진공원 갔었다.

가서 동물들도 보고 아빠가 빵빠레 아이스크림도 사줬는데.

아빤 기억 못 하더라?

아빠.

너무 미안해하지 마.

그렇게 소중한 추억들이 있으니까.

나도 아빠 딸이어서 행복했어.

물론 힘들 때도 있고 아빠 미워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난 아빠 많이 사랑해.

우리 다음 생에 꼭 만나자.

꼭 다시 만나서 이번에 너무 짧게 끝나버린 시간까지 다음 생에 지겹도록 오래오래 보면서 살자.

나 시집도 안 가고 아빠랑 노처녀로 살 거야.


오늘은 아빠가 참 많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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