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주 불편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나를 닮은 사람이 보인다. 문밖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 앉아 있다. 회색빛이었던 2012년 가을, 뒤가 시원하게 뚫려있는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앉아 있던 사람은 나 였다. 문을 열고 나가지도 못할거면고 안에 있어도 무서운 것은 마찬가지 였다. '이번에 눈을 감으면 다시는 뜨고 싶지 않다.'라는 기도와 함께 눈을 감아 본다.
나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과연 여기서 나갈수 있을까?
첫 승진을 했다. 뱃속 안에는 우리의 보물 1호가 크고 있었다. 유럽 마켓에 C형 감염 치료제 허가 후 심사 평가를 받기 위해 약학 경제학과 성과 연구로 유럽 으로 출장을 오가면 정신없던 날들 보냈다. 회사에서는 신이 나서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정신 줄을 놓고 입덧을 했다. 겉으론 아무 표시도 없는 임신 초기, 아기가 잘 크고 있나 라는 불안함을 잠 재워주던것은 입덧 이었기에, 그 저 감사 하며 지나 갔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에 첫 아기를 맞이할 방이 많고, 커다란 수영장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가족들과 친구들의 과분한 사랑이 넘치는 성대한 베이비 샤워를 받았고, 지금 이 행복을 기억하자며 임신 사진도 남겼다. 뭐가 더 부족해? 우리에게 허락된 사랑과 은혜는 과분했고 넘쳤다.
2011년 12월
전날 밤 양수가 터져 병원에 온 이후 20시간이 지나간다. 무통주사의 효과가 사라진 것은 오래전이다. 시계는 오후 5시 지나 간다. 배안에서 무섭게 폭풍우가 친다. 내 몸과 연결되어 있는 모니터가 요란하게 울리고 간호사와 의사들이 급하게 뛰어 들어온다. ‘뭔가 잘 못되어 가고 있는것 같다’ 침대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급하게 수술방으로 옮겨진 후, 소독이 시작 됙고, 전신마취가 시작되었다. ‘응급 제왕절개 가 시작될 겁니다’ 라는 말과 함께 기억이 사라졌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한 체 많은 일들이 아주 빨리 일어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추워서 눈을 떠보니, 처음 보는 천장이다. 천천히 손을 들어 더듬더듬 배를 만져 보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떡해, 우리 아기 어디 갔어?
“우리 아기 어디 있어요?
살아 있어요?
건강한가요?”
절박한 질문들은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내 질문이 들리기나 한 걸까? 두려움 속에 나는 어떤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침묵을 깨고, 간호사가 옆에 와서 물어본다. How are you? 괜찮니? 괜찮지 않은 것을 알면서 왜 괜찮냐고 물어보는 걸까?
I don’t know.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라고 겨우대답을 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간호사가 말을 이어간다. 아기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아서, 응급 제왕절개가 시작되었고, 아기는 지금 신생아 중환자실 (Neonatal Intensive Care Unit)에 있다고 말해주고 의사 선생님을 부르러 간다고 하고 나를 혼자 두고 가버렸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아프가 점수에 대해 얘기하신다. 아프가 점수 (A.P.G.A.R score) 너무 나도 잘 안다. 약대 마지막 학년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로테이션을 했었다. 5가지 항목 (외모와 피부색, 맥박수, 반사 흥분도, 활동성, 호흡)으로 막 태어난 신생아의 상태를 평가하는 점수이다. 출생 후 1분, 5분 후에 측정한다. 건강한 신생아는 5가지 항목 전체 합의 10점이다. 우리 아기의 아프가 점수가 1점이었다고 한다. 출생 시 호흡곤란증으로 울지 않았고 전신이 청색증이었고 심폐소생술 후 인튜베이션 이후 지금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다고 했다. 얼마나 산소공급이 중단되었을지 모르니 다른 병원으로 이송해서 치료를 받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그날 밤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 잠깐 스쳐 지나가듯 그렇게 우리 아기를 처음 만났다.
일주일 후 아기도 나도 퇴원을 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11주의 산후 휴가를 마치고, 한쪽에는 컴퓨터 가방과, 한쪽에는 모유 수유기가 들은 가방을 들고, 나는 보란 듯이 엄마도 일은 더 잘하는 워킹맘이 될 거라고 되뇌며 기세 당당함이 가득한 높은 구두를 신고 출근했다.
나는 아닐 거야. 내가 왜?
매사 긍정적이고 열정적이었던 나 인데…
약사도 피할 수 없었다.
산후우울증에 대해 배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었던 산후 우울증
2012년 가을, 텅 비어 버린 내 머리처럼, 뒤가 휑하니 뚫려있는 하얀 가운을 입은 채 병원에 앉아 있는 나를 만났다. 약사 라면서? 네 명 중 한 명의 산모가 산후 우울증에 걸린다는 통계는 그냥 나와 상관없는 숫자 인 줄로만 알았다. 산후 우울증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약물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 모르고 있는 거 아니었잖아? 우울증, 산후 우울증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고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내 머릿속에 꽉 차 있었던 그 생각.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 이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시도를 했고, 실패를 했고, 응급실이다. 사태의 심각성이 드러났고 그렇게 치료와 치유가 시작되었다.
그때 생각을 하면 아직도 몸이 부르르 떨린다.
근육에 기억이 꿈틀거리는 마냥, 가슴이 아리고 눈 이 시라다. 아파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아픈지. 지금도 아픈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먼저 반응 한다. 비슷한 상처를 안고 하루를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의 그늘이 보이기시작한다. 비슷해 보이는 상처이기에 성급히 다가갈 수 없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기에...
괜찮아?라는 말도 조심스럽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픔에 길들여지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치료와 치유의 시간과 비례한다. 괜찮지 않은 날들이 괜찮아지기까지 아주 많은 날들이 지나가야 했다. 약사도 아플 수 있고, 치료가 필요했었다. 약물치료를 시작으로, 치유는 계속되었다. 그 치유는 나랑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나눌 때 완성되어 갔다. 커다란 폭풍우 앞에 힘없이 흔들리던 불씨 하나 간당간당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힘없던 불씨를 지켜낸 건 그 주의를 감싸주었던 사람 바람막이 들이었다. 사람의 사랑의 온기. 내 불씨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조용히 바람을 막아주던 사람들,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고, 직장에서 나를 끝까지 지켜주고지지해주고 믿어주는 리더들이 있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던 세나가 그 빛을 잠시 잃었어, 그 빛을 다시 찾을 때까지 우리 기다려주자.” 감사하게도 나를 지켜주는 그런 사람들이 나의 리더들 이었더. 내 사람들의 빛을 지켜주는 사람, 약한 빛도 다시 보고, 희미하게라도 작은 불씨라도 살아 있다면, 그 불씨의 끈을 함부로 놓아서는 안된다.
회복탄력성 : Resilience
회복 탄력성은 힘든 것을 견뎌내는 강함이 아니라, 힘이 들면 힘들다 말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수 있는 힘 이다. 내 힘으로 내일을 만나지 않으려 했다가 실패한 이후 나는 더 이상 내일을 위해 살지 않기로 했다. 그때부터 그저 오늘만 살아보기로 했다. 나에게 허락된 오늘을 감사하고, 오늘을 건강히 살 수 있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오늘을 온전히 마주하는 일. 어둠만 가득하던 끝이 안보이던 터널을 지나가던 중에 나를 꼭 잡아 주던 빛이 있었다. 어둠을 밝혀주는 빛을 만나면 감사하다고 말한다. 한마디의 감사가, 감사가 담긴 행동이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빛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이 안 보이는 터널을 걸어가던 나에게 왔던 빛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