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fear moving slowly forward…fear standing still.” - Kathleen Harris
사실 나 2016년 겨울부터 우울증 약을 다시 먹고 있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모유 수유를 끊고 나니 보이기 시작한 산후 우울증 증상들에 덜컥 겁부터 났었다. "이번에도 우울증이 오는 건가? 다 낳은 거 아니었어..."
항우울제 약을 먹은 지 6-7 개월이 지나갔던 그 여름, 우울증 약을 조금씩 줄여 가기로 했던 그 여름에 우린 미국에서 싱가포르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직장, 새로운 집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바뀌어 버려서, 약을 줄이는 게 불안했었다. 가을, 겨울이 되면 다시 우울증이 찾아올까 하는 불안함은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2017년 8월 골드코스트, Gold Coast, Australia
싱가포르로 이주하고 아시아 태평양 전략 마케터로 일을 시작한 후 첫 출장은 호주였다. 학회가 열린 곳은 골드코스트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호주 바다를 만났다. 시차 때문이었는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하얀 새 운동화를 신고 호텔방을 나섰다. 무작정 바다가 보일 것 같은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아직도 찬 공기가 가득하던 그 아침이 눈앞에 보인다.
조금 달려서 도착한 바닷가. 운동화를 벋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발가락 사이사이 들어가는 모래 기분이 너무 좋았다.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며 아침부터 서핑을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어쩌면 이런 아침이 당연한 일상인 아이들. 이렇게 아름다운 아침을 매일 보며 서핑을 할 수 있다는 게 당연하지 않은 감사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익숙한 것들에 무디어져 감사하지 못하는 우리의 일상. 그 아침, 골드코스트에 바다는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 감동이었다.
신기하게도 호주에 왔는데 내가 알고 있던 겨울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밝고 따뜻한 호주의 겨울은 내가 알고 있던 가을과 겨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한국 그리고 미국 동부의 가을과 겨울 날씨에 익숙해져 가을이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겨울이면 매서운 추위가 당연하다고 믿고 살았던 나에게 낯설었던 호주의 겨울바다는 너무 완벽했다. 내가 알고 있던 어둠이 시작되는 시기, 가을이 없는 싱가포르와 겨울이어도 따뜻한 호주에서 나는 또 다른 시작을 감지했다.
산후 우울증의 증세가 시작되던 시기와 맞물렸던 가을과 겨울, 그 어둠이 나를 다시 삼켜 버릴까 봐, 겨우 다시 찾은 나를 또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어둠의 두려움 안에서 약을 줄이면 산후 우울증이 다시 재발할 거라는 불안과 걱정 안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It is the darkest always before the dawn..." 아침 새벽에 해가 뜨기 전에 가 가장 어둡다고 한다. 어두운 곳을 자꾸 뒤돌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 나아가 보기로 했다. 두려움을 당당히 마주 하기로 했다. 그 눈부시게 반짝거리던 골드코스트의 바다 앞에서, 늦여름 같은 겨울 나는 오늘만 달려 보기로 했다. 호주인 동료가 웃으면서 말했다. 보통 호주 사람들은 골드 코스트 가서 술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넌 거기서 달리기를 시작했구나… "Most Australians spend their time in the Gold Coast drinking."매일 우울증 약을 먹었던 것처럼 나에게 처방전을 내렸다. 약을 줄이면서, 불안해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오늘만 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