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롱 Sep 26. 2023

비가 와도 괜찮아

응원은 계속


 우리 동네를 곱슬머리로 평정한(?) 나는(<곱슬머리의 슬픔과 슬픔> 참고) 예나 지금이나 비 오는 날을 매우 싫어한다. 팔이 뻐근해질 때까지 고데기와 씨름을 하고 나와도 밖에 5분만 서 있으면 꾹꾹 눌러놓은 머리가 구물구물 일어나기 때문이다. 올여름은 비가 자주 와서 힘들었다. 마침 오늘도 비가 왔네요.


 어느 금요일이었다. 야구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비가 왔다. 경기가 안 열리거나 열려도 중단될 것 같았다. 내심 남편이 가지 말자고 하길 바랐는데 기대를 저버렸다.

 "비 와도 재밌을 거야~"

 남편은 어릴 때부터 비 오는 날을 참 좋아한다. 내리는 비를 보며 참 예쁘게도 온다고 할 때마다 나는 뭐? 비? 무슨? 내 머리 안 보임? 이런 생각을 했다. (맞아요. 저 T예요.) 이러니 아무리 야구를 좋아해도 비가 오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


 오후 6시쯤 서울에서 대전으로 가는 KTX를 탔다. 그날따라 바빠서 종일 피죽도 한 그릇 못 먹은 상태였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배고프면 몹시 예민해지고 울컥울컥 화를 낸다. 대전역에 내릴 즘에는 약간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경기장행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굵어진 빗줄기를 보고 있자니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냥 취소하자고 할 걸. 이렇게 쏟아지면 얼마 못할 거 같은데. 금요일에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분노)'

 먼저 대전에 도착한 남편은 호텔에 짐을 풀고 경기장에 들어가 있었다. 버스에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마음을 달랬다. 나도 오고 싶어 한 거니까, 화는 내지 말자, 나는 지성인이다(중얼중얼)...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멀리서 문현빈 선수 응원가가 들려왔다. 배고픔과 내리는 비로 인해 불타던 마음은 허무하게 꺼지고 말았다. '나는 행복합니다'까지 부르는 걸 보니 역전을 한 모양이었다. 하, 역시 오길 잘했어!(?) 매점 앞에서 만난 남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떡볶이와 순대, 맥주 세트를 주문했다. 떡 세 개, 순대 두 조각, 맥주 한 모금을 한입에 넣고 나니 그날 대전광역시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이 맛에 야구 못 끊지.


 5회가 지나가고 비가 점점 더 오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경기는 중단됐지만 이미 속이 둔둔했으니 괜찮았다. 마침 응원석 맨 뒷자리라 비를 맞지도 않았다. 환한 조명 앞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자니 이런 걸 운치라고 하는 건가 싶었다. 낭만에 빠질 틈도 없이 텅 빈 그라운드를 선수들 대신 응원가 원곡이 가득 채웠다. 비 오는 야구장은 그야말로 열린 클럽이었다. 비를 맞으며 응원가를 따라 부르고 덩실덩실 춤추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물론 보고만 있지 않고 같이 열창, 열댄스 했답니다.


 40분을 기다려도 비는 그칠 줄을 몰랐고 결국 경기는 강우 콜드로 끝났다. 아쉽게 1점 차이로 졌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10점 차이로 지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껄껄 웃으며 호텔로 갔다. 따뜻한 물로 씻고 시원한 막걸리 한 잔 마시고 푹신한 침대에 누우니 낙원이 따로 없었다.

 "비 오는 날도 괜찮네."

 "웬일이야?!"

 "그동안 야구 보러 온 거 중에 오늘이 제일 좋았어. 올 땐 좀 힘들었지만."

 "다행이네~"

 곱슬머리의 명예가 있으니(?) 비를 기다리는 것까진 힘들겠지만 너무 싫어하지는 말아야겠다. 비가 오는 것도 꽤 괜찮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20년 전 나와의 헤어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