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조카가 태어난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하루종일 눈을 감은 채 주먹을 꼭 쥐고 입술을 내밀면서 뭔가 표현하고 싶어하는 작은 아이를 보는 것은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일이었다. 일주일에 몇 번씩 동생 네에 들러 아이의 살냄새를 맡고 행복해 했다. 아이가 없는 나에게 조카는 피붙이란 감정을 처음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 조카를 위해 나는 뭔가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그 아이를 위한 통장이다. 한달에 10만원씩 입금하고 그 아이가 20살이 되면 "너 하고 싶은 거 다해" 하면서 전달하는 멋진 고모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통장 전달식까지는 4년이 남았다.
반 고흐는 조카가 태어났을 때 이 그림을 그렸다. "꽃이 핀 아몬드 나무(Almond Blossom)"이다. 푸른 하늘 아래 아몬드 꽃이 가득하다. 1890년에 반 고흐가 그의 조카, 빈센트 빌렘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화면 가득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위로위로 뻗어가는 가지에서 조카가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고흐의 동생 테오는 형의 작품 활동을 돕기 위해 물심양면 도움을 주었다. 두 사람의 우애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회자될 정도로 두터웠다. 편지를 통해 동생에게 재정적 지원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자신의 작품 설명을 하는 등 열정과 에너지를 표현했다. 반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만 650개 이상이다.
형의 생활비와 물감 및 캔버스 값 등을 지원하면서 동생은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지원하고 격려해 주었다. 편지를 읽어 보면 자신이 힘들어도 형이 원하는대로 도와주는 동생이었다.
어느 날 테오는 형에게 편지를 쓴다.
"아이 이름은 형 이름을 따서 지었어. 그리고, 그 아이가 형처럼 단호하고 용감해질 수 있도록 소원도 빌었어."
반 고흐는 동생 테오의 편지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반고흐는 매우 감동했고 자랑스러워했다. 빈센트가 이 그림을 그릴 때 조카를 얻은 기쁨이 하늘을 찌를 듯 용솟음쳤음을 느낄 수 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작품 중 가장 공을 들인 작품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 기쁨도 잠시. 1890년 7월29일 반고흐는 37세 나이에 권총 자살을 한다. 조카가 태어나고 약 5개월이 지난 뒤였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테오에게도 충격이었다. 6개월 뒤 형의 뒤를 따라 죽음에 이른다. 테오의 아내 조안나는 반고흐의 그림과 편지들을 모아 반고흐의 그림을 알리는데 노력한다. 반고흐는 미술 인생 10년 동안 약 860점의 유화를 포함하여 약 2,100점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렇다면 반고흐의 조카 빈센트는 큰아버지의 선물을 받고 기뻐했을까?
영화 <반고흐, 위대한 유산>에서는 반고흐의 조카 빌렘의 시점에서 큰 아버지를 바라본다.
빌렘은 어머니가 소장했던 큰아버지 빈센트의 모든 작품을 팔기 위해 여기저기 갤러리를 수소문한다. 그림을 팔아 자신이 하는 철도 관련 일에 투자하기 위해서이다.
빌렘은 아버지 테오가 일찍 사망한 것도 큰아버지 탓이라고 원망하며 빈센트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들을 팔고자 한다. 전혀 반고흐 그림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고흐가 살았던 아를, 생레미, 오베르 쉬르 우아즈 등을 찾아 그의 숨결을 찾아 나선다. 결국 억눌려 살았다고 생각한 유산의 무게를 덜어내고 반고흐의 순수한 열정을 깨닫고 그림들에 애정을 갖게 된다. 빌렘은 소장한 모든 작품을 국가에 양도하고 이를 바탕으로 1973년 반고흐 미술관이 개관한다. 빌렘은 비록 미술관 개관 4년 뒤 사망했지만 자주 미술관을 들러 자신을 위해 그렸다는 <꽃이 핀 아몬드 나무>를 감상했을 것이다. 그림을 보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큰아버지의 숨결과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이 반고흐의 다른 그림과 얼마나 다른지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어느 것보다 밝고 희망찬 느낌. 반고흐에게 조카는 그러한 존재였다. 차가운 겨울을 지나 3월에 피는 꽃처럼 희망을 가져다 주는 존재.
조카는 20년 동안 준비한 나의 선물을 받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탄생의 순간에 느꼈던 나의 감동과 기쁨을 그 통장 어디에서 느낄 수 있을까? 4년 뒤 조카에게서 들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