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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레네 Jul 22. 2024

우리 모두는 예비 사별자

<2023 좋은생각 청년이야기대상 공모전> 대상 수상작

“여보세요, 카드를 해지하려고 하는데요.”

“네, 본인 되시나요?”

“아니요... 남편이 사망을 해서요. 배우자입니다.”    


“여보세요, 명의를 이전하려고 하는데요.”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배우자인데요, 남편이 사망을 해서요.”   


“여보세요, 미납금을 처리하려고 하는데요.”  

“본인이신가요?”

“아니요... 남편이 사망을 해서요. 미납금 처리하라는 문자 받고 연락드렸습니다......”   


서른한 살에 나는 과부가 되었다. 7년을 함께 했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내 앞에 남겨진 것은 자동차 할부금과 카드빚, 학자금대출, 그리고 마이너스통장. 처리해야 할 산더미 같은 현실뿐이었다. 어디 도망가지 않고 내가 다 갚겠다는데도, 세상은 나에게 자꾸만 자격을 증명하길 요구했다. 자꾸만 내 입으로 남편이 사망했고, 난 그 사람의 배우자임을 말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주민센터에서도, 은행에서도, 휴대전화 너머로도. 나는 몇 번이고 남편의 사망을 내 입으로 시인해야 했다.     


게다가 카드를 해지하고, 명의를 이전하고, 빚을 갚는 그 모든 과정은 늘 수십 장의 서류와 복잡한 절차를 요구했다. 서류들은 왜 이렇게 종류도 많고 이름도 어려운지. 우리 사이엔 미성년자 아이도 있어 내가 빚을 상속하겠다는 상속인의 신분을 확정하는 일이 더 까다롭고 복잡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온전히 느낄 새도 없이, 당장 일처리의 어려움 때문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어야만 하는 현실이 비참했다.     


그렇게 사후 처리를 해나가며, 내 입은 계속 남편이 사망했음을 여기저기에 말해야 했고, 내 귀도 자연스레 그 말을 하루에도 몇 번, 듣고 또 들어야 했다. 또한 서류를 검토하며 눈으로는 내 남편이 이제 사망한 사람임을 반복적으로 새겨야 했다. 남편의 기본증명서에 새겨진 ‘사망’이라는, 아직도 낯선 그 단어를 몇 번이고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고, 세대주인 나와 세대원인 아들, 이렇게 둘만 남게 된 그 휑한 주민등록등본을 확인하며 남편의 죽음을 재차 실감해야만 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래야만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장례식 이후 충분히 애도하고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 한 달의 휴가를 낸 것인데, 정작 그럴 여유도 없이 나는 앵무새처럼 남편이 사망했음을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눈으로 수도 없이 남편의 사망 소식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했다.      


처음엔 이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렇게 내 남편의 죽음을 수도 없이 이야기하고, 듣고, 보다 보니 어느새 내 속에선 이 사실을 객관화하는 작업이 시작되고 있던 모양이었다. 가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은 어느새 흐르고 있었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던 슬픔은 조금씩 무뎌지기 시작했으며,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눈물도 조금씩 멎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석 달이 흘러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왔다. 여전히 소화되지 않는 슬픔과 처리해야 할 일들은 남아있지만, 그동안 계속 남편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어서일까. 어느새 조금씩 나는 남편이 사망했음을 비로소 ‘실감’하고 있었다. 이별을 실감하자 내가 가진 종교적인 믿음도 실감하게 되었다. 세상에서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님을, 우리에겐 다시 만날 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이 예비 되어 있음을 실감하자, 비로소 내 안에 평안이 찾아왔다.   


장례식 때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예비 사별자’라고. 내가 조금 더 일찍 겪은 것뿐이라고. 남편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아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 땐 귀에 들어오지 않던 그 말이, 지금에서야 와 닿는다. 그리고 잔잔한 위로로 오래 가슴에 남는다. 힘들지, 괜찮아질 거야, 라는 말이 감정적으로 위로가 되었다면, 우리 모두가 예비 사별자라는 그 말은 이성적으로 위로가 되었던 듯하다.    


모두에게 언젠가 있을 사별이라는 사건이 내 삶에, 특별히 서른하나라는 조금 이른 나이에 찾아온 이유가 있을까. 모든 일에 신의 촘촘한 섭리와 계획이 있다고 믿는 나는 그 이유를 석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남편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새겨야 했던 그 시기.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진짜 그 사실을 실감하고 나니 이제는 남편을 보다 더 건강하게 그리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수많은 이들의 삶이 보이고, 나의 할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실감’의 과정이 진짜 필요한 이유를, 이젠 알 것 같다.     


나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객관화해야 하는 그 고통스런 과정을 지날 이들에게, 또는 오늘도 아프게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내 삶이 위로로 가 닿을 수만 있다면, 너무나 허망한 서른여섯 젊은 남편의 죽음에서 조금이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는 위로가 필요한 그 한 영혼을 찾아 헤매려 한다. 동정을 넘어 위로와 공감으로, 더 나아가 연대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볼 힘이 내 안에 조금은 생긴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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