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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니카 Nov 19. 2024

당신봄날아침편지215

2024.11.19 오광수 <어쩌라고, 이 가을>

오늘은 단풍얘기를 해볼까요. 은행나무가 세속으로 들어와 속인들과 뒹굴며 자리를 틀었다면 단풍나무는 아직도, 속세를 떠난 수도자들의 고고함과 비장함에만 곁을 내주는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지고 있는것 같아요. 어느 시인은 단풍을 보고 가슴앓이를 하는 누군가가 대낮부터 낮 술에 취한 모습이라고 말하지만 제가 보기엔 만취한 그 누구라도 나갔던 정신이 확 돌아올만큼 단풍의 자태는 유혹입니다.   

   

전주향교 옆 경기전(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에는 단풍나무 한그루가 아주 붉었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온 관람객들이 우리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지요. 20대 청춘이 단풍을 보며 괜시리 폼잡고 한 잎 두 잎 잎을 따서 하늘로 던졌던 옛날이 생각났어요. 그 청춘의 어느 가을날, 붉은 가을단풍잎 하나 들고 사진속으로 걸어 들어왔던 옛 모습이 떠올라 앨범을 보니,,, 얼마나 앳되고 순해보이던지. 누구인가 하고 여러번 되물었네요.^^     


지금모습이라도 사진속에 새겨놓으면 또 먼 훗날, 말하게 될까요? ‘아고 앳되고 순해보이네’라고요? 글쎄요. 이제는 그런 말을 하기에 너무 많은 세월의 주름살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으니, “오호통재라” 라고 소리없는 탄식을 질러보았답니다~~     


어제 오늘 급강하하는 기온탓에 은행나무 단풍나무 살빛들이 저절로 침착해지겠지요. 분위기 잡고 추억 만들고 싶은 우리들에게야 더없는 호재이지만, 저 물상들이 자기몸과 뼈대를 내보이게 될 아픔의 시간 또한 가까이 오려니... 저들의 모습을 풍경으로만 강탈하지 말고, 넌지시 말 한마디라도 건네야겠습니다. ‘수고하고 짐 진 그대여, 바람따라 짐 풀어 놓으시길. 그대에게서 낮은 삶의 고결함, 텅빈 삶의 충만함을 배우고 싶소이다’라고요. 오광수시인의 <어쩌라고, 이 가을>입니다. 봄날의산책 모니카     


어쩌라고, 이 가을 - 오광수     


가을비는 만남보다 이별에 익숙하다

이별에 익숙해지는 나이

이 비 그치면 또 누군가가

땅거미를 틈타 이별을 고해올지도 모른다

낙엽 지는 숲길을 향해

산 자들의 가슴을 짓밟고 떠나가겠지만, 또 어쩌랴

가을 단풍은 서럽게 타오르다가 이내

낙엽으로 질 터인데

마음이나 한 자락 비워두고

가을 햇볕 쨍쨍한 날 기다려

꼬들꼬들 말려둬야겠다  

   

가을 햇빛은 늘 사선으로 쏟아진다

명궁의 화살처럼 날아와 가을을 건너는

모든 이의 가슴을 명중시킨다

푸른 잎을 단숨에 붉게 만들고

까투리 한 마리 바람나서 둥지를 떠나게 하는

저 가을은 누구인가

수많은 가을을 보내고도

수줍고 가슴 설레는 이 가을엔

한 번쯤 환장할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디

살아 있다고 외칠 수 있을까

    

어쩌라고 이 가을은 십수 년이 지난 오늘에도

늙어 지친 심장까지 요동치게 하는지

내 허리를 부여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지   

  

철 지난 유행가 같은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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