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이루어지는 길2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포기하지 않을 용기만 있다면
분명히 원하는 길에 설수 있다.
- Paul Cluny -
2021년 7월 17일, 의왕의 한 야외 공원.
'탕!'
갑작스러운 큰 총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미국에서 온 친한 형과 후배와 저녁 식사 전에 가볍게 농구를 하기로 했다. 코로나로 실내 농구장이 모두 문을 닫은 탓에, 우리는 후배 집 근처 공원에서 농구공을 튀기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건이 벌어졌다.
강렬한 소리에 놀라서 뒤를 돌아봤지만, 주변은 평온했다. 그런데 왼쪽 다리에 이상한 감각이 느낌이 들었다. 발을 들어 올리려는 데, 발목이 축 늘어져 버렸다. 그때 깨달았다.
그 소리는 총소리가 아니라, 내 몸에서 뭔가 중요한 게 끊어지며 난 소리였다.
급히 택시를 타고 안양 한림대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검사 결과는 '좌측 아킬레스건 파열.' 더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해 지인의 추천으로 서울 세종스포츠정형외과로 옮겼고, 태어나 두번째로 입원했다. 수술이 끝난 후에는 긴 재활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는데,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중 가장 염려되는 건 하나였다.
'혹시 회복이 안 돼서, 산티아고길에 못 가면 어떡하지?'
사건이 터지던 날, 형과 1대 1로 10점 내기 경기를 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무릎을 살짝 굽혀 슛을 던지던 찰나, '탕!' 하는 소리. 정말 사소한 동작이었다. 생각해 보니 일주일 전 농구 시합 때 불편한 신발을 신고 무리하게 뛰었던 게 원인이었을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억울했다. “왜 하필 나한 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내가 운이 좋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약했던 아킬레스건이라면, 점프해 공중에 떠 있을 때 끊어졌다면? 착지하면서 복합 골절이 일어났다면? 그랬다면 평생 제대로 운동도 못 하고, 산티아고길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퇴원 후, 목발에 익숙해질 무렵 네이버 '까미노 친구 연합' 카페에서 산티아고길 설명회 소식을 발견했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지금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지만 언젠가는 꼭 가야지.’
그 간절한 마음을 안고 목발을 짚고 택시를 타고 중곡동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의 커다란 다용도실에는 산티아고길에 필요한 장비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2시간 동안 열정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설명회가 끝난 후, 주최했던 여행사 대표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날, 산티아고길을 걷는 희망이 다시 피어올랐다.
그렇게 재활에 전념하며 1년을 보냈다. 몸은 회복됐지만, 이혼 후 맞닥뜨린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사는 게 너무 숨 막히고 답답했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계속 미루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50년 동안 애쓴 나에게 주는 선물로, 산티아고길에 꼭 서 보자.’
오랫동안 소통해온 여행사 대표에게 연락해 2023년 여름, 계약금을 보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여행사 단톡 방에 난리가 났다.
2023년 가을 출발 예정이던 팀의 여행이 돌연 취소됐고, 고소 사건까지 터졌다. 카톡 방에는 대표를 향한 욕설과 절망이 가득했다. 하나 둘 카톡 방을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무기력하게 그 방에 남아 있었다.
며칠 후, 기대도 없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이 됐다.
“대표님,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요?”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든 원상 복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믿고 기다려주세요.”
대표는 코로나로 인한 여행사 경영 악화를 만회하려다 코인 투자를 했다가 더 크게 실패한 상태였다. 화가 치밀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상황이 나쁜 거겠지...’
그렇게 대표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대표는 이후에도 문제 해결을 하겠다며 추가 금전을 요구했다. 그때 확신했다. ‘이 사람을 믿고는 산티아고길에 갈 수 없겠구나.’
그 즈음, 친한 형님에게 한 통의 문자가 왔다.
형님의 지인이 페이스북에서 '2024년 산티아고길 원정대 모집' 글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링크를 클릭하자 산티아고길의 멋진 사진들과 설명회 일정이 눈에 들어왔다. 고민 끝에, 2024년 4월 말 출발하는 원정대의 사전 설명회에 신청했다. 2023년 11월 늦가을, 서촌의 작은 알베르게 카페에서 열린 설명회는 예상보다 더 진심이 느껴졌다.
“함께하는 여행이지만, 혼자 걸으며 사색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마음 깊숙이 와닿았다. 설명회가 끝난 후, 원정대 대장에게 솔직하게 내 상황을 털어놨다.
“사실 이전에 여행사에서 사기를 당했어요. 이혼 후 어렵게 다시 꿈꿨던 여행인데, 지금 상황이 너무 힘드네요.”
대장은 끝까지 내 이야기를 들어주더니 말했다.
“어렵겠지만, 함께하신다면 최선을 다해 의미 있는 시간이 되도록 도와드릴 게요.”
그 순간, 다시 마음이 움직였다.
돌아보면 내 인생은 좌절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사기당하고, 응급실에 실려 가고, 어렵게 결혼했는데 이혼하고, 다시 산티아고길 여행 사기를 당하고...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다시 '산티아고 원정대'에 신청했다. 산티아고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저 그 길이 나를 계속 부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마다 집을 나서며, 그 길 위에 있는 내 모습을 그리며 하루 하루를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