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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용서의 언덕

꿈이 이루어지는 길2

by 폴 클루니

용서는 과거를 잊고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 Paul Cluny -


산티아고길 4일 차

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23km 걷는 구간이다. 부슬비를 맞으며 길을 나섰다. 비가 많이 내리진 않았지만, 우비를 꺼내 입고 걸으니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어렸을 땐 비가 오면 우산 없이 빗속을 뛰어다니거나 운동도 많이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비를 맞으며 걸어본 적이 없었다. 우비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가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오늘은 팜플로나 도심을 벗어나 작은 레이나 마을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중간엔 산티아고길의 상징적인 장소 중 하나인 ‘용서의 언덕’이 자리하고 있다. 해발 770미터, 순례자들이 팜플로나에서 레이나로 향하는 길목에 마주치는 그곳은 예로부터 죄를 씻어내는 성찰의 장소로 여겨졌다. 전통에 따르면, 순례자들이 이 언덕을 오르면 과거와 현재의 죄가 용서되며, 순례자들에게 내면의 성찰과 용서를 상징하는 특별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비가 그치게 되었고 용서의 언덕에 오르는데, 문득 반갑지 않은 얼굴이 생각났다. 산티아고 길을 출발하기 이틀 전이었다. 회사 근처 식당에서 친한 후배와 기분 좋게 점심을 하려고 주문을 하고 있는데 좌측 대각선 부근에서 익숙한 굵고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어 바라보게 되었다. 그쪽에는 14년 전 나에게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준 사람이 막 식당에 들어와 주문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대학 시절 연합서클 선배였던 그는 한때 연매출 100억 원이 넘는 회사를 운영하며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2008년 연말에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었는데 본인이 많은 도움을 주겠다며 자주 연락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너 지금 현금으로 동원할 수 있는 금액이 얼마나 되냐?”

확인해 보겠다고 하자, 그는 곧 알아보고 연락 달라고 했다. 그 당시 이미 친한 형이 경제적으로 많이 힘든 상황이라 돈을 빌려줬지만 아직 받지 못한 상태였고 남은 금액은 마이너스 통장에 남아 있는 2천만이 전부였다. 나는 솔직히 선배에게 힘든 상황을 말했다.


"금액이 얼마 안 되네. 회사에 입금될 돈이 지연돼 갑자기 자금이 필요해서 그런데, 다른 데 말하기는 창피하니 가능한 금액이라도 1주일만 빌려줘라."

망설였지만, 믿을 만한 선배라고 생각했고 그의 약속을 믿고 돈을 빌려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나를 포함해 연합서클 선후배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10억 원 넘게 빌리고 갚지 않아 사기죄로 고소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어리석은 실수로 우리 가족은 더 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결국 거짓으로 일관하다가 구속까지 되어 수감생활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고통스러웠지만 혹시 모를 기대감으로 판결문 한 장 받아들고 그냥 잊고 열심히 살수 밖에 없었다.

그날, 식당 안에서 그가 7~8명 정도 되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뛰고 열이 얼굴이 확 닳아 올랐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멱살을 잡고 한방 날려주고 싶었지만, 숨을 고르며 그가 식사를 마치길 기다렸다. 자리를 뜨려는 순간, 나는 조용히 다가갔다.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그는 반가운 얼굴로 “야~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하고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순간 울컥 치솟는 화를 누르며 말했다.
“지금 나한테 잘 지냈냐는 인사를 하는 거예요?”
내 표정이 굳어지자 선배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나를 식당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야~ 인마. 정말 반가워서 그런 건데 왜 그래?”
그는 오히려 얼굴을 붉혔다.
‘이 사람, 정말 변함이 없구나.’


“나랑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 안 나세요?”

화가 부글부글 끓어 올라왔지만 더 큰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연락처를 받고 상황이 되면 금전적 피해를 보상해 달라는 이야기만 하고 헤어졌다. 사람이란 정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새삼 느꼈다. 꿈의 산티아고 길에 떠나기 전, 행복이 충만한 시간에 내 삶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힘든 기억을 안겨준 사람을 다시 만난 건 어떤 의미일까?

용서의 언덕에 서서 그 얼굴을 떠올리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언덕을 내려오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레이나 마을에 도착했다. 저녁에는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레이나 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했다. 신부님께서 순례자들을 위해 축복도 해주시고 작은 선물도 주셨다. 생각해 보니 진짜 선물은 14년 넘게 상처로 남았던 그 선배의 악연을 ‘용서의 언덕’에서 털어 낼 수 있는 마음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레이나의 명소인 ‘여왕의 다리’에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는데 다리 위에서 바라본 석양이 속상했던 마음을 덮어주듯 차분해 보였다.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 오늘 하루도 참 길었구나 싶었다.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길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배낭을 다시 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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