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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수비리에서 흘린 것

꿈이 이루지는 길2

by 폴 클루니

인생에 쉬운 길은 없다.


- Paul Cluny -


산티아고길 2일 차
스페인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21km 걷는 구간이다. 1일 차 눈보라를 맞으며 피레네산맥을 넘고 나니,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어제에 비하면 짧고 쉬운 코스라고 하니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한국과 스페인의 시차는 보통 한국이 8시간 빠른데, 서머타임이 적용되는 3월 마지막 주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까지는 7시간 차이다. 내가 여행을 한 시기는 5월, 한국 저녁 10시는 스페인 오후 3시였다.
한국에 있을 땐 매일 저녁 10시마다 CBS 라디오 허윤희 님의 ‘꿈과 음악 사이’를 즐겨 들었다. 그래서 산티아고 길을 걷기 전부터 품었던 로망 하나가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오후 2시 전에 도착하고, 샤워하고 빨래하고 맥주 한 잔을 여유 있게 마시면서 라디오를 들으며 에세이를 쓰고 싶었다.

프랑스 여행 중엔 가고 싶은 곳이 많아 오후 3시에 라디오 듣는 건 엄두도 못 냈다. 그래서 만만하게 느껴졌던 2일 차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피레네도 넘었겠다, 무서울 게 없었다.
아침은 빵과 과일로 간단히 때우고, 간식도 제대로 안 챙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여유 있게 도착해서 알베르게에서 맥주 한 잔 하며, CBS 레인보우 앱에서 흘러나오는 허윤희 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에세이를 쓰는 모습에 상상만 해도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출발은 산티아고 원정대 사람들과 함께 했지만, 빨리 가고 싶어 혼자 앞서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중간에 간이 레스토랑이 있었지만, 배가 그리 안 고파 ‘다음 식당에서 먹어야지’ 하고 그냥 지나쳤다. 조금 지나니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는데, 그다음부터는 식당이 보이질 않았다.


점점 배가 고파서 갖고 있던 간식을 꺼내 먹었지만, 허기를 채우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때 문득 파리 숙소 체크 아웃할 때 호스트가 준 작은 꿀단지가 생각났다. 그때부터는 배가 고플 때마다 작은 스푼으로 꿀을 떠먹으며 당을 충전하고 걷기 시작했다.‘아까 그 식당에서 그냥 먹을 걸.’ 자꾸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지나온 길 돌아갈 수도 없고, 다시 수비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식당은 보이질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금세 지쳐 스푼으로 꿀을 떠먹는 것도 힘들어서 결국은 뚜껑만 열고 그냥 빨아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들게 걷고 있는데 어제 피레네산맥 아래서 휴식을 취하며 인사를 나눴던 영국인 제인을 다시 만났다. 그녀는 유쾌하고 밝은 영국인 할머니였다. 내 짐작으론 70세가 넘었을 것 같은데 산티아고 길을 사랑 해서 여러 번 걷고 있다는 간강하고 활기찬 분이었다. 제인이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자기가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가리키며 “너도 먹을래?” 하는 손짓을 했다. 그냥 인사치레였을 텐데, 나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도 당황했을 거다. ‘뭐 이런 친구가 있지?’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고맙게 먹고 있던 샌드위치 끝 조각을 건네줬고, 나는 그걸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양은 적었지만, 그 한 입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Thank you so much, Jane.”

감사를 전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꿀을 빨아가며 한참을 걸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걷고 있는데, 멀리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수비리에 도착한 것 같았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보니 작은 수비리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로 이어진 다리 아래, 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며 개울물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처음 겪는 감정에 당황스러웠다.

‘내가 왜 우는 거지? 감동해서 그런 건가? 아니면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이 떠올라서 그런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견딜 수 없는 배고픔에 바로 근처에 보이던 바에 들어가 허겁지겁 음식과 맥주를 시키고 야외 테이블에 주저앉았다. 먼저 나온 맥주 한 모금 마시는데 그 시원함과 탄산의 톡 쏘는 맛에 죽어가던 세포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곧이어 나온 음식은 얇은 고기에 치즈를 입혀 튀긴 돈가스와 비슷한 요리였다. 한입 먹는데 너무 맛있어 맥주와 음식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배를 채우고 나니, 조금 전 눈물의 이유가 떠올랐다. 그건 감동도, 슬픔도 아니었다. 그냥… 배가 너무 고팠던 거였다. 몸에 당이 다 떨어져 탈진 직전까지 가니 몸이 나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던 거다. 만만하게 본 2일 차 길에서 꿀을 빨아가며 그렇게 배고픔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오래전 유치원 다닐 때 울었던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어렸을 때도 다 커서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배고픔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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