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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내가 만난 피레네

꿈이 이루어지는 길2

by 폴 클루니

삶은 기대와 다른 길에서 깊어진다.


-Paul Cluny-


프랑스 남부도시 바욘을 떠나 산티아고 길 출발지인 생장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하는데,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눈부시게 하얗다. 바욘에서 기차를 타고 55km 정도를 1시간 넘게 달려, 생장-피에드포르에 도착했다. 역에 내려 주변 풍경을 보는데 멋지고 아름다워서 ‘우~ 아. 우~ 아’ 탄성을 지르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연신 찍으며 산티아고길 순례자 사무소로 향했다. 내일부터 떠날 산티아고길에 필요한 순례자 여권을 받기 위해서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렜고 곧 만나게 될 서울에서 온 산티아고 원정대 멤버들과의 만남도 기다려졌다.

사무소 주변에 도착하니, 세계 곳곳에서 모인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날씨만큼이나 다들 표정이 밝고, 설렘으로 가득해 보였다. 주변을 두리번 하며 상상의 날개를 한창 펼치고 있는데 내 차례가 와서 자원봉사자와 간단한 인터뷰를 시작했다. 봉사자분이 왜 이 길에 왔는지 질문을 했고 답을 했다.

“지금까지 50년을 살아왔고 앞으로 다시 50년을 살아야 하는데 이 길을 걷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서 왔다.” 고 대답을 했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를 해주는데 나의 산티아고 길 여행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부엔 까미노’는 산티아고길 인사말로 Buen (좋은) Camino (길) 이었다. 간단히 인터뷰를 마치고 떨리는 마음으로 순례자 여권을 받아 들고, 첫 도장을 꾹 찍었다.

그리고 오늘 묵을 첫 알베르게로 향했다.

여기서는 순례자들이 머무는 숙소를 ‘알베르게’라고 부른다. 한국의 게스트하우스와 비슷한 느낌이다. 문을 열고 산티아고 순례길 첫 숙소에 들어섰다. 막상 들어서니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면서도, 순례자들의 땀 냄새가 느껴졌다. 알베르게에는 이미 서울에서 먼저 도착한 산티아고 원정대 멤버들이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 나누며 서로에게 이 길에 온 것을 환영하며 축하 인사를 나눴다. 저녁이 되자 부근 레스토랑에서 달콤한 와인과 함께 산티아고 길 전야 만찬을 맘껏 즐겼다. 우리는 당분간은 이렇게 편하게 식사하는 자리가 없을 거라는 알고 있었다. 즐거운 저녁식사 시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 배낭을 다시 한번 챙기는데 내일부터 시작될 800km 여정으로 묘한 설렘과 긴장감이 온몸에 감돌았다. 처음 써보는 이층침대는 운 좋게 1층으로 배정받았고 누워서 피레네산맥을 어떻게 넘을지, 여러 명이 자는 이곳에서 잠은 잘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어느새 정신을 잃고 말았다.

피레네산맥은 생장에서 출발해서 순례자가 넘는 첫 관문으로 넘는 언덕의 높이가 약 1,430m 정도가 된다. 이 산맥을 넘으면 자연스럽게 프랑스를 지나 스페인 국경을 넘게 되는데 그 길에 울창한 숲과 푸른 초원, 바위 능선이 조화를 이루는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넓은 초원과 산 위의 목장에 평화롭게 양과 소들이 풀을 뜯어먹는 모습을 오랫동안 꿈꿔왔다. 출발 전날 비 예보가 있어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밖으로 나가봤다. 정말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고 앞을 가리는 안개가 자욱했다.

첫날 피레네산맥을 넘는 게 가장 힘들지만, 풍경은 최고로 멋지다고 했는데

안 좋은 날씨에 마음 한편에 아쉬움이 커져갔다. ‘인생에 한 번 뿐일 수도 있는데…’

서운한 마음을 뒤로하고 트레킹화 끈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조용히, 산티아고를 향해 첫 발을 내디뎠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는 점점 거세지고, 안개도 짙어졌다. 가시거리가 5미터도 안 되는 듯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놓친다는 게 야속했다. 게다가 올라갈수록 날씨는 더 추워졌다. 5월 초면 장갑이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손이 시려 입김을 ‘호호’ 불며 산을 올랐다.

그렇게 첫 휴게소인 오르손 산장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차가워진 몸을 녹이고, 간단한 식사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셨다. 밖으로 나와보니 비는 진눈깨비로 바뀌었고, 조금 더 올라가자 눈보라가 몰아쳤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피레네에 눈이 오면 위험해 경찰들이 길을 통제해서 피레네를 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실제 많은 순례자들이 오른손 산장에서 눈으로 변하는 날씨를 보고 포기하고, 다시 생장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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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춥기도 하고, 과연 넘을 수 있을까 걱정도 들었다. 계속 올라가다 보니, 눈은 점점 더 쏟아졌고, 5월에 첫날 피레네는 어느새 설산으로 변해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길에 눈이 점점 쌓이고 주변이 하얗게 되어가는데 문득 산티아고 길을 떠나기 전, 피레네산맥 넘는 연습도 하고 제주의 한라산 설산을 보기 위해 2월에 예약까지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는 날씨가 따뜻해서 눈이 없다는 말에 한라산 산행을 취소했었다. 그런 내가 인생의 첫 설산을, 피레네산맥에서 맞이하게 될 줄이야.


앙상한 나뭇가지에 핀 눈꽃이 아니라, 푸른 잎 위에 하얗게 내려앉은 눈꽃은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아름다운 설산의 풍경에도 계속되는 추위와 몰아치는 눈보라에 눈처럼 쌓이는 피로와 긴장으로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렇게 바짝 긴장하며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정상을 지나 산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한참을 내려가는데, 함께 온 일행 중 한 분이 우비를 깔고 쉬고 계셨다. 따뜻한 차 한 잔 권하며 잠시 쉬어가라는 말에 나도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첫 구간에 눈이 많이 와서 긴장을 했던 터라 휴식이 꿀처럼 달콤했다. 나눠 주신 간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있는데, 그분이 “좋은 게 있다”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셨다. 그건 서울에서 갖고 온 라면 스틱 스프였다. 처음 보는 그것을 보온병에 담아 온 뜨거운 물에 타서 건네주시는데 매콤한 향기가 일품이었다. 한국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나니 얼큰한 국물에 집밥을 먹고 싶었는데 칼칼하면서도 따뜻한 국물 한 모금에 긴장도, 추위도 스르르 녹아내렸다.

하산길, 쏟아지던 눈도 멈췄다. 눈꽃 사이로 연두 빛 잎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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