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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낮술의 통증

꿈이 이루어지는 길 2

by 폴 클루니

길 위에서 진짜 나를 만나게 된다.


- 파울로 코엘료 -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가장 좋은 건 단조로운 일상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히 식사하고, 해 뜨는 풍경을 보며 걷고, 새로운 친구들과 인사 나누고 또 걷고, 먹고 마신다. 성당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어가 잠시 묵상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루 걸어야 할 거리를 채우게 되고, 알베르게에 도착한다.


모든 알베르게에는 순례자 여권에 찍을 수 있는 다양한 도장이 마련돼 있다. 새로운 도장을 찍는 재미가 은근 쏠쏠하다. 단벌인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샤워하고 빨래하고, 오후 3시쯤 되면 애청하는 CBS 허윤희 님의 ‘꿈과 음악사이’를 들으며 맥주 한 잔 마시고 에세이를 쓰고, 여유가 되면 책도 조금 읽는다. 저녁이 가까워지면 함께 온 이들과 식사를 해 먹을지, 사 먹을지를 고민하다가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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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나 간식을 먹을 때는 늘 맥주나 와인을 곁들인다. 스페인은 해가 좋고 포도 생산량이 많아 와인도 싸고, 맥주도 물보다 저렴하다. 나는 이렇게 단순한 하루가 왜 이렇게 좋은 걸까.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산티아고 길에선 매일이 새롭게 느껴진다. 아마도 매일 새로운 길을 걷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에 있을 때도 생각해 보면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른 아침엔 네이버 카페를 관리하고, 상담 준비하고, 상담하고, 업무 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바쁘게 지내는 나에게 가끔 동료들이 묻곤 했다.


“술은 좀 드시나요?”
“네. 좋아하고 낮술도 좋아합니다.”
“진짜요? 안 드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


사실 술을 잘하진 못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한잔 하며 즐기는 걸 좋아한다. 특히 아주 가끔 낮술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세상 부러운 게 없다. 낮술을 마신다는 건, 치열한 삶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다는 힐링 타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괜찮아, 좀 쉬어도 돼’라고 말해주는 느낌이랄까.
그게 낮술의 진짜 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을 떠나 프랑스를 여행하고, 산티아고 길을 걷는 동안엔 아침에도 가끔 마시고, 걷다가 바가 보이면 한 잔, 점심에도 한 잔, 저녁에도 마셨다. 그냥 즐겼다. 낮술은 내게 여유였고, 여유는 곧 작은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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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어느 날, 고기를 먹는데 우측 윗니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별거 아니겠지 싶었는데, 매일 술을 마시다 보니 염증이 커져서 그런지 점점 아파졌다. 여행 오기 전, 치과 원장인 후배가 챙겨준 진통제로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통증이 심해져 술을 마실 용기가 없어졌다. 심한 날엔 통증이 이에서 시작해 목을 타고 머리까지 퍼졌다. 잘 자던 잠도 깨고, 쉽게 잠들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산티아고 길에선 먹고 마시는 게 큰 즐거움인데, 그걸 제대로 못하니 슬펐다. 태어나서 치통으로 이렇게 아프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걷다 보면 이상하게 또 괜찮아졌다. 아파도 걷고 있는 건, 이 길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10년 전부터 바래 왔던 ‘꿈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힘든 시간들도 지나고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통증을 견디며 걷다 보니, 술도 못 마시고 먹는 것도 줄었지만 작은 일상처럼 느껴졌던 낮술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파도 행복했다.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인 데도 그냥 좋았다. 그게 왜 가능했을까?

통증은 분명 있었지만 걷다 보면 잊혀지고,
아파도 함께 걸어주는 좋은 사람들,
지나치는 아름다운 풍경들,
“부엔 까미노!”라는 응원 같은 인사들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10일 넘게 술을 못 마시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하다가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맥주 한 잔에 고기를 먹었는데 미세한 치통이 다시 올라와 술을 마실 용기가 또 사라졌다.

평생 치통 한 번 없던 내가, 이 좋은 여행에서 왜 아프게 되었을까?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작은 통증도 이렇게 힘든데 큰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힘들까? 몸이 아파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자꾸 떠올랐다.


명선 누님과 어머님,
진석이 딸 지윤이,
세훈이 형,
진중형 어머님,
영미, 영희님,
희수형 형수님,

명헌형 형수님,
김언주 선생님과 그 어머님...


각자의 자리에서 다들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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