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이루어지는 길2
길을 함께 걸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세상 든든한 일이다.
– Paul Cluny –
산티아고 길을 걷다 보면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름도 모르고, 인사만 반갑게 나누고 지나가는 사람도 많지만 이상하게 자꾸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날은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려 오렌지색 우비를 입고 걷고 있었다. 저 앞쪽에 파란 우비를 입은 여성이 반려견과 함께 걷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풍경이라 호기심이 생겨 뒤를 빠르게 따라가 인사를 건넸다. 되지도 않는 영어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는 독일에서 온 발렌티나, 그리고 옆의 강아지는 그녀의 반려견 샐리였다.
샐리는 건강해 보이면서도 아직 한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리고 귀여운 강아지였다. 가까이 가서 쓰다듬으며 인사를 하려 했지만 ‘으르렁’ 거리며 경계를 해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샐리는 오직 발렌티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렌티나는 키가 나랑 비슷한 175쯤 되어 보였고, 어깨에는 체격에 맞는 큰 배낭을 메고 있었다. 샐리도 네 발로 자기 배낭을 양쪽에 짊어진 채 발렌티나를 따라 걷고 있었다.
잠깐 쉬는 틈에 들은 이야기로는, 샐리는 전 주인에게 버림받은 유기견이었고, 그런 샐리를 입양해 키우다가 이번엔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게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샐리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발렌티나만 유독 따르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짧은 만남 이후 우리는 헤어졌지만, 걷는 길 위에서 그 둘이 잘 걷고 있는지 자꾸 생각이 나고 보고 싶었다.
그리움이 깊어질 무렵, 우리가 다시 만난 날은 한낮 더위가 한창이었다. 샐리는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 단단히 버티고 있었고, 발렌티나는 가야 할 길이 멀다며 목줄을 당기고 있었다. 계속 버티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무리 이름을 부르며 달래고 재촉해도 꿈쩍 않던 샐리는, 결국 발렌티나의 끈질긴 끌어당김에 마지못해 엉덩이를 떼고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가서 등을 토닥이며 응원해주고 싶었지만 여전히 가까이 가면 ‘으르렁’ 대는 통에 마음으로만 응원을 전해야 했다.
그날도 샐리는 등에 배낭을 메고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해 물어보니, 샐리가 먹을 사료가 들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 짐은 자기가 지는 것”이라며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결국, 각자 짐 하나씩 어깨에 메고 인생길을 걷고 있다. 누구는 짐이 없어 보이거나 가벼워 보이지만, 사실 다들 보이지 않는 곳에 무거운 짐 하나쯤은 안고 살아간다. 그저 서로의 상황을 모를 뿐인 것 같다.
발렌티나는 샐리와 함께 걷기 위해 많은 걸 감수하고 있었다. 샐리가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는 바람에 쉽게 어울리지도 못하고, 힘든 여정 속에서도 샐리가 실내에서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반려견과 함께 지낼 수 있는 비싼 숙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동 속도도 늘 샐리에 맞춰주는 듯했다. 그렇게 둘은 친구처럼, 가족처럼, 동반자처럼 아껴주며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날 이후 또다시 마주쳤을 땐, 걷기 싫어하던 샐리가 이제는 근육도 제법 붙고 잘 걷는다고 발렌티나는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그 자랑이 샐리에게도 들린 듯, 표정에서 자신감과 건강함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샐리는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말은 없지만, 그 눈빛에는 분명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
샐리를 보며, 문득 나 자신이 겹쳐졌다. 나 역시 짐을 지고 이 길을 걷고 있었고, 때론 멈추고 싶고 버티고 싶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
말없이 옆에서 함께 걸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정말이지... 세상 든든한 일이다.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각자의 짐을 메고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