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일기는 쓰여진다.

by 해질녘

1. 일기는 정해진 규칙이 없다.

일기는 어떤 규칙이나 절차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그냥 쓰면 된다. 쓰다 보면 "아!~ 내 글에도 규칙이 필요하구나"를 느끼고 나서 조금씩 수정하면 된다. 어떤 규칙이나 절차에 얽매이면 내면에서 쓰고 싶은 글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냥 쓰다 보면 시가 되기도 하고 설명문이 되기도 하고 소설이 되기도 한다.

2. 일기는 일상이어야 한다.

일기는 내가 화장실에 가서 밥을 먹고 똥을 싸는 것처럼 일상이 되어야 한다. 일기도 밥을 먹는 것처럼 우리가 읽고 보고 느낀 것 즉 직접 경험이나 간접 경험을 통해 느꼈던 것을 기록한다. 경험해 보지 않으면 쓸 수 없다. 개인의 경험이 소중한 것이 그 경험들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고유하기도 해서 그렇다. 누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이번 생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인간이 유일하게 남길 수 있는 것이 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글이 없었다면 내가 그 시대를 살았었는지 알 수 없다.


3. 일기는 감정의 쓰레기통이다.

일기는 어떻게 보면 감정의 쓰레기통이라고 해도 된다. 일상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 중에 생각보다 내 마음에 담아두기보다는 글로 드러내어 조금씩 내 마음의 짐들을 덜어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 쓸 때는 모르지만 그 감정들을 조금씩 덜어낼 때마다 내 마음이 단단해지고 내 마음은 그 감정들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4. 일기는 메타인지의 준비단계이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그 등장인물들 중에 내가 그럴 수도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삶을 제3의 나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행동과 생각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행동과 생각의 원인을 찾아 잘못된 결과에 다다르는 것을 예방하는 훈련은 글쓰기가 아니면 알 수 없다. 내가 쓴 글을 보면 나를 알 수 있다. 기록된 나의 일상에는 생각보다 빈 공간이 많다.


5. 일기는 다이어리이다.

하루를 시간 단위로 쪼개서 기록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단순히 일상의 기록이 아니라 해야 할 일과 목표를 세우고 매일 계획하고 실행하고 그 결과를 피드백하다 보면 내게 부족한 점이 보이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일기는 내 인생의 나침반과도 같아서 인생의 어디에 있어도 길을 잃지 않게 해 준다.


6. 일기는 해야 하는 숙제가 아니다.

내가 일기를 쓰게 된 배경은 초등학교 때의 숙제가 아니다. 숙제가 되고 공부가 되면 일기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된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시켜서 엄마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책 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껴야 책을 읽을 수 있고 일기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나도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국어 선생님의 권유로 조금씩 쓰게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쓰게 된 것은 짝사랑을 하게 되면서 그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그 감정을 쓰면서부터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학은 그런 사랑의 감정들을 느끼면서 겪게 되는 스토리의 집합체였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


7. 일기는 인간과 자연을 이해하게 해 준다.

일기를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써야 한다. 쓰다 보면 우리가 물음표를 가지고 바라보았던 여러 현상들에 대해 조금씩 느낌표로 바뀔 때가 있다. 그 중심에 철학이 있었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과 우주 그리고 믿음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신과 종교는 오직 텍스트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서양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철학과 에세이를 여전히 대학시험의 통과의례로 채택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 자신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어떻게 읽히는지는 어떤 책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상상이 되면 제대로 읽은 것이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면 다시 읽으면 된다. 다시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쓰고 그러다 보면 세상이 그려지고 내가 그려지고 타인이 그려진다. 한 편의 소설처럼 영화처럼 그림처럼 노래처럼 유명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나만의 것으로 그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이전 13화12장 손이 알아서 글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