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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원 Oct 11. 2019

효진


 나야. 너를 이따금 동경하고 자주 걱정하는 애. 내가 언젠가 네 이름이 효도할 효에 다할 진이냐고 물어봤었지. 아니라고 해주길 바랐는데 아니라고 해줘서 다행이었어.


 내가 노란색 머리였고 네가 갈색 머리였을 때 처음 만났잖아. 우리는 신입생이었고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는 유난히 낯을 가리는 동기들이 많아서  자꾸 맥이 끊기고 정적이 흐르는 자리였어. 게임이 앞에서 자꾸 끊겨서 술은커녕 물만 홀짝거리고 있었고, 나는 살짝 짜증이 날 참이었어. 어쩌다가 드디어 네 차례가 왔을 때, 넌 일부러 박자를 틀리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폭탄주를 단번에 마셨잖아. 분명히 기억해. 넌 일부러 틀리고 능청스럽게 찡긋거리고 멋있게 소맥을 말았어. 다 마시고 나서는 어깨를 살짝 흔들었어. 그때부터 네가 멋있다고 생각했어. 그때부터 그 자리가 재밌다고 생각했어.


 나는 네가 내 앞에서 처음 욕한 날도 기억해. 우리는 동기들이랑 정문 쪽에 있는 가게에서 찜닭을 먹고 있었고 다 먹어가는 참이었을 거야. 너는 카톡 하나를 확인하더니 단전에서부터 욕을 끌어다가 썼어. 같이 아르바이트하던 남자애한테 카톡으로 고백받았던 그날이야. 거기 있는 애들 다 네가 안 어울리는 얼굴로 욕하는 거에 놀랐는데, 나만 손뼉 치면서 웃었잖아. 지금 생각해도 웃겨. 내숭이란 내숭은 다 부리고 있었으면서 그걸 못 참고 욕한 게 너무 웃기잖아. 사실 너 내숭쟁이인 거 나는 다 알고 있었어.


 처음 풀죽어하던 날도 기억해. 원래는 다 같이 술 마시러 가기로 한 날이었어. 같이 가기로 한 동기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네가 갑자기 전화 한 통을 받고는 못 간다고 그랬어. 너는 불고기 버거 삼백 개를 만들러 가야 한다고 했어. 사실 진짜 웃겼는데 안 웃긴 척했어. 근데 보내고 나니까 너무 미안한 거야. 그 술자리에 누구랑 갔었는지 아니면 나도 안 갔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그냥 그날 네가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힘없이 흔들던 손만 기억나. 나는 그게 마음에 깊게 남아있어.


 우린 사실 2학기 때부터 친해졌잖아. 너는 1학기 동안 학교 밖 사람들이랑 술 마시고 사랑하고 일하느라 학교를 잘 안 나왔으니까. 시험지도 백지로 내고 아주 학교엔 미련도 없다는 듯이 굴었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곳에 오긴 마찬가지면서 나는 버릇대로만 행동했었어. 말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다른 곳에 마음을 쏟는 네가 멋있었어. 언니 같았어.


 2학기가 되니까 너는 학교에도 마음을 쏟았어. 학교는 여전히 잘 안 나왔지만, 녹음파일을 열심히 듣고, 밤새워서 공부하고, 과팅도 나가고. 여기저기 마음을 다 쏟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어. 이때부터야. 내가 너를 걱정하기 시작한 게. 글이나 술로 같이 몇 밤을 나니까 너는 나를 이름 끝 글자로만 부르더라. 우린 오래도록 친구겠구나, 했어.


 내가 이상한 놈한테 마음을 사기당했던 때 있잖아. 나는 사기꾼이 보고 싶어서 너랑 술 마시다가 울었어. 네 앞에서 운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너는 내가 술 마실 때마다 걔 때문에 우는 걸 더는 못 보겠다고 했어. 너는 내 눈물을 짐작했던 거야.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너 없이 울 때를. 너는 내 핸드폰을 뺏어서 걔한테 전화를 걸었어. 걔가 전화를 안 받으면 잊고, 받아도 안 나오겠다고 하면 잊고, 나오겠다고 하면 더 생각해보자고 했어. 너는 너무 언니 같았어. 지나 보다도 더 큰 언니 같았어. 걔가 나오겠다니까 너는 또 단전에서부터 욕을 끌어다가 썼어. 그리고 그 새끼가 오면 평소 하고 싶었던 말, 술 취한 척하고 다 하라고 했어. 정갈하고 똑떨어지게 발려있던 내 입술을 뭉개던 네 손을 기억해. 그건 더 이상 지지 말라는 당부 같았어. 근데 나는 그날 처참히 졌어. 또 차였으니까. 근데 다 진 건 아니야. 그날 이후로는 걔 때문에 안 울잖아. 근데 진아. 너는 언제 울어?


 가끔 말랑말랑한 얼굴을 하는 걸 보면, 틀림없이 무른 복숭아 같은 얼굴을 하고 울 텐데. 내 앞에서 운 적 없지만 알 수 있어. 네가 내 눈물을 짐작하는 것처럼, 나도 너의 눈물을 짐작하니까. 네가 많이 좋아했던 그 오빠랑 헤어졌을 때도 혼자 울었을 거고, 급하게 입원할 만큼 아팠던 때도 혼자 울었겠지. 화목과 행복이 위태로워져도 넌 혼자만 울었을 거야. 나약해질까봐 참은 날이 운 날만큼 많겠지. 생일 선물로 향초를 보낸 건 그래서야. 더는 혼자여서 우는 밤과 혼자여도 못 우는 밤을 보내지 말았으면 해서야. 이제는 그 향초가 같이 울어주거나 대신 울어주길 바랄게. 우리 진이. 생일 축하해. 모든 글이 소용없을 만큼.


2019.07.30 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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