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일간의 비
뮤지컬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가 올해 재연으로 나를 다시 찾아온 뒤 작년에 적은 후기를 다시 읽었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그때와 지금 내가 느끼는 바가 완전히 다른 지점이 있었고, 또 올해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후기를 적어놓은 부분도 있었다. 사실 나는 올해 작년의 나보다 다소 일방적인 성장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작 한 달 전에 적은 글이 부족하게 읽히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 년 전에 적어 놓은 글이 지금보다 훨씬 읽기 쉽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일취월장하고 있다는 나와의 생각과는 제법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무뎌지고 후퇴한 부분이 분명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 나의 성장을 바라지만 때로는 뒤를 돌아보면 내가 놓치고 온 것들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최근 나는 앞서 말한 뮤지컬을 관람하면서 작년과 나는 어떤 면으로 다르게 성장했을지 궁금했고 또 한편으로는 어떤 면으로 후퇴했을지 궁금했다. 사실 본질적으로 뮤지컬을 관람하고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은 좋아하는 배우의 3개월 쉼 이후로 처음 공연을 관람했을 때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생은 발전하는 것 같지만 후퇴와 발전의 굴레에서 균형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3일간의 비는 사실 나에게 많은 위로감을 안겨준 뮤지컬이다. 뮤지컬을 보면서 문득문득 들었던 생각을 브런치에 적어보고자 한다.
나는 워커가 본인의 아버지인 네드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속단했던 것처럼, 낸 또한 라이나와 네드의 결혼을 본인의 시선으로 속단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한들 본인의 경험으로 타인의 인생을 바라보고는 한다. 그러니 나는 진심으로 낸의 결혼이 행복하길 바라지만 부모의 결혼도 결국 낸이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평생 본인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고뇌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라이나는 결혼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뇌에 빠져 있었다. 라이나는 하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으나 여러 가지 한계에 갇혀 있었고,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그 시대의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러니 라이나의 고민은 결국 타인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한때의 권태로움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도 살아가면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본인에게 증명하는 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네드가 라이나에게 '그대로인 모습도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것이 라이나에게는, 타인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한계를 벗어난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라이나는 결국 결혼에서 본인의 영혼을 찾아내지 못했다. 네드와 라이나는 대화를 하면서 둘의 공통점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 테오에 대한 말을 했고, 둘은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라이나는 결국 네드가 죄책감으로 무너지기 시작할 때에 네드에게 뮤즈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라이나가 네드와 결혼을 하고 애들을 낳고 기꺼이 네드의 뮤즈가 되어 주었던 것이 나에게는 라이나 스스로 다시 자신을 미로 속에 떠밀어 넣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뮤즈라는 것을 선택했으나 그것이 라이나에게는 아무런 무게감을 선사해주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때가 되어 그저 주변에 있는 이들과 결혼을 한 것이라는 낸의 말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들의 결혼을 바라본 낸의 시선이 그러했던 것을 생각하면 결국 낸의 결혼 또한 도피의 수단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종종 들었다.
여성이 주체가 되어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남편을 보필하고 집안에 충실하며 괜찮은 남자와 결혼해 사는 것이 최선이자 바람직한 생애였던 것처럼 실상 낸 또한 시대상으로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 라이나는 늘 결혼을 하면 본인의 '진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찰을 했고 결론적으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나 네드와 결혼을 했다. 또한 낸은 워커에게서 든 지배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나는 낸이 워커에게서 든 지배적인 감정을 종종 이해하고는 하는데, 말 그대로 누군가를 볼 때에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이 나를 지배하는 폭력적인 감정은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킨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한국에 사는 모든 집안의 장녀들은 흔히 이런 압박감 속에 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심지어 낸의 동생 워커는 정신이 불안정했고, 대학시절 소꿉친구이자 낸과 연애감정으로 끌리는 사이였던 핍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사실 워커의 정신적 불안정을 때로는 외가에서 물려받은 가족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유전받은 우울감과 방랑하는 이의 권태로움처럼 보이곤 했다. 그러나 뮤지컬을 보면 볼수록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라이나의 우울감이 어떨 때는 유전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본인이 선택한 것들에게서 느끼는 무력감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유년시절 워커의 눈앞에서 창문을 향해 뛰어드는 어머니를 워커는 그렇게 묘사한다. 그리고 사방으로 피가 튀겼고 워커는 건물 내부의 세탁실에 숨는다. 가족들은 모두 충격 속에 빠졌으나 워커는 직접적으로 그 상황을 목격했고, 나는 어떤 일이 있을 때에 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서 또 그 고통에 직면할 정도의 용기가 없어 그저 넘어가는 것이 워커에게 있어 효과적인 처사였을지 대한 의문이 든다. 우리는 모두 어떤 고통을 겪을 때에 방어적으로 그 감정을 제어하게 된다. 그러나 그저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겪는 슬프거나 화나거나 행복하다는 감각에 무감각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게 된다. 나는 1부에서 나오는 워커의 행동들과 말들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방어기제처럼 보였다. 나는 워커가 굉장히 답답해 보였다. 워커와 같은 사람들이 말미가 안 좋다는 말 또한 워커가 본인의 상태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알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자신의 감정을 쳐내는 것도 벅차서 워커는 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니 나는 워커의 얼굴이 마냥 이기적인 얼굴로 보이지 않았다.
연극에서는 그 어떤 부분에서도 워커가 가족에게서 유전받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워커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묘사 또한 없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것이다. 천성적으로 본디 기질이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는 이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심으로 이런 시대의 이런 삶을 갈망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의 삶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나아지려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우울의 구렁텅이에서 절대 빠져나올 수가 없는 이들의 상황. 그러나 타성에 젖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여행을 가는 것도 워커는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한 걸음을 매일 걷고 있는 것이다.
앞선 글에 적어 두었듯 나는 워커를 너무 사랑하고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낸이 말하는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 또한 공감한다. 워커의 죽음은 낸에게 한순간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낸에게 찾아오는 평화는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워커에게서 느끼는 감정에서 비롯된 낸의 발버둥이 아닐까 생각했다. 낸은 워커가 고작 10살 남짓한 나이에 어머니가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견뎠으나 워커의 고통은 오롯이 워커의 것이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니 낸이 워커에게 겪는 감정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동생을 계속 돌보는 것은 압박감과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관객과의 대화의 질문에서 '낸이 부모들에 의해 워커를 돌보게 되었으니 부모를 미워하였겠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낸이 워커를 안타까워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워커는 10살이었고 본인은 12살 남짓한 둘 다 10세에 근접한 나이라는 것을 설명할 때에 자신도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나이라는 것을 설명할 때에 자기 연민이 보였다. 그러나 워커를 돌보게 된 것에서 부모를 미워했다는 생각에 놓이기보다는 본인이 처한 막막한 상황에 놓였을 때에 그런 원망감이 들었지 않았을까.
핍이 말하는 것처럼 흔히 어린아이들이 너무 빨리 철이 드는 것은 그런 일은 비이상적인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럴 필요가 없는, 그러면 안 되는 순간에서 누나라는 것을 이유로 누군가를 늘 걱정하고 챙기고 하는 그 모든 순간들 속에서. 사실 이 관계를 붙잡고 있는 것은 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혈육이기에 끊을 수 없는 것들. 사랑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는 것. 진심으로 절벽에 몰려있기에 그런 이성적인 판단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가족.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그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원하게 되는 것. 사실 가족은 우리의 손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우리 손으로 쉽게 끊을 수 없고 쉽게 미워할 수도 없고 쉽게 사랑할 수도 없다. 네드는 라이나를 본인의 손으로 선택했고, 라이나는 본인의 선택으로 괴로워했으나 라이나는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워커는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했다고 말했으나 핍은 그러지 않다고 말했고, 라이나도 워커에게 비슷한 감상을 말했다. 아버지가 너무하셨다는 것에 대한 공감인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플라뇌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황홀해 보였던 것을 기억하면 워커의 이름을 다시 생각할 때에 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최근에 봤던 뮤지컬과 연극은 <라흐헤스트>와 <3일간의 비>였는데, 이상과 라이나를 바라보면 이 둘은 그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 발버둥 치는 청년들이라는 점에 유의할 수 있다. 나는 젊은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이 그 시대적인 배경을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라이나는 자신의 존재의 의의를 결혼이 아닌 다른 것들에서 찾을 수 있을지 고뇌했다. 이들 모두 원하는 것은 많았으나 단 하나도 이루지 못했던 것. 시대에 갇혀 있는 이들이 나에게는 마음이 아프다. 실상 내가 말하는 예술의 범위는 지나치게 넓고 내가 말하는 것들은 늘 틀리기에 그러니 뮤지컬에서 보이는 이상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분명 생각한다. 시대적으로 예술가들이 고통받았던. 기질이 예민했던 이들이 흔히 이 위태로운 나라와 본인의 목소리를 낼 수 없던 한계 속에서 어떻게 건강하게 예술을 할 수 있었을까.
예전에는 단지 네드의 죄책감이 선함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네드가 말을 더듬는 것을 테오가 다그치는 장면에서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모든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서 엉망으로 꼬인 실타래처럼 그저 네드의 모습이 무고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네드가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테오가 자신의 천재성으로 계속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 상호 간 파트너 관계에 있어서 암묵적인 룰이라는 것 자체가 점차 내 눈에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디자인 계통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쪽만 아이디어를 내고 한쪽이 그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이 얼마나 불공평한 것인지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암묵적인 룰 속에서 결국 테오의 연인이었던 라이나와 바람을 피우고 본인이 건축물을 설계하여 테오가 서 있던 공간을 빼앗은 것이, 초반 라이나에게 네드가 말한 원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책감은 실로 개인적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천재성을 빌미로 아이디어는 테오가 내고 검사받는 것. 그것이 동등한 위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아이디어를 내는 것을 원할 때에, 테오가 고갈되어 있을 때에도 네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테오의 아이디어가 고갈되었을 때 네드는 테오의 천재성을 입에 담을 뿐 네드에게 그 어떤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오직 테오만의 천재성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를 해결할 때에는 너와 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함께 해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것이다.
어떤 글에서 3일간의 비라는 연극은 결국 죄책감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생각이 정리가 된 다음 후기를 적고 공연을 온전히 관람하는 것이 나에게는 있어 큰 행복이지만 사실 요즘은 정리하지 못하는 생각이 너무 많다. 분명 앞으로는 전처럼 긴 글을 적지 못할 것을 알지만 3일간의 비는 관람하면서 생각할 부면이 많아 열심히 적어본다. 떠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남은 날에 극장에서 3일간의 비를 꼭! 관람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