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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파란 Jul 17. 2023

그깟 간 기증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식 수술을 며칠 앞둔 저녁, 함께 식사를 위해 친정 식구들이 모였다. 아빠, 엄마, 언니와 형부, 우리 네 식구, 동생과 제부 그리고 조카, 남동생까지. 큰일을 앞두고 밥 한 끼 하자고 모인 대식구에게 우울함은 없었다. 늘 그랬듯 씩씩하게 할 일 마치고 다시 또 이렇게 모일 거라는 걸 다 안다는 믿음 덕분이다. 친정 근처 식당에서 고기를 먹기로 한터라 주방에서 식전용 과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그래도 수술 전에 너희 아버님이 아빠한테 전화라도 한 통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 아빠가 말은 안 해도 기다리는 거 같은데”

“아직 전화를 한 번도 안 하셨어?”     




‘혹시’나 ‘설마’의 범주에도 들지 않을 만큼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당신의 아들이 암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고 투병을 하는 내내 우리 가족 곁에서 우리 아이들을 챙기고 우리 끼니를 챙기고 우리 안위를 챙긴, 당신이 하지 않은 그 일을 해 온 내 부모님께 겉치레라도 좋으니 ‘고맙다’는 한마디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적 있었다. 친정 부모님이 그걸 바란 적은 없지만 도의상 그래도 한 번쯤은 연락을 주셨으면 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무려 며느리가 본인 아들에게 간을 내어주는 수술을 앞두고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종종 간이식 수술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된다. 특히 부부간의 이식을 두고 가족의 갈등 상황은 매번 비슷하다. 멀쩡한 간을 떼어줘야 하는 기증자의 부모는 길이길이 날뛰고 목숨 부지를 위해 그 간을 받아야 하는 이의 부모는 잘못한 건 없지만 죄인이 되어 고개를 숙인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최근 방영됐던 드라마 <닥터 차정숙>도 마찬가지였다. 며느리 차정숙에게 간 기증을 하고자 서약서에 서명을 하려는 아들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냅따 뛰어와서 볼펜의 똥도 닿지도 않은 그 서약서를 찢어발긴 시어머니.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며느리 차정숙.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그 누구를 탓할 수는 없다.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일에 뛰어든다는 것은 단지 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인호의 엄마처럼 난리난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부모님이 무례한 시아버지에게 한바탕 호통을 쳤더라면 좀 나았을까.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늘 그렇듯 현실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가혹하다.      

  


나의 아빠는 우리 수술 날짜가 잡힌 뒤 쓰디쓴 마른침을 삼켜가며 살고 계신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마지못해 새벽 출퇴근을 하며 부지런히 살고 있지만, 당장이라도 녹아 없어질 듯한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버티고 계신다는 걸 말이다. 나의 엄마 역시 낮에는 애들 보고 밤에는 기도하며 잠을 잊은 지 오래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난 그런 부모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내가 모른 체한다고 해도 시아버지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날 그림자 취급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우리 부모님까지 우습게 보는 듯한 태도에 난 이미 이성을 잃었다. “고맙다” 한 마디만 될 일이었다. 그 한마디를 안 하시는구나. 겨우 견뎌내고 있는 나를 기어코 부서뜨리는구나.     



식당으로 가는 길, 아이들을 다른 차에 태워 보내고 둘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미친 사람처럼 울어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가 더 비참한가 대결이라도 하듯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남편은 수술을 무르자고 했다. 누군가의 무례함에 애꿎은 사람들만 치열하게 싸우는 꼴이었다. 그때의 우리는 그 자체로도 불구덩이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는데,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았나 보다. 생애 처음 느껴보는 참담함이었다.      



그깟 간 기증! 아마도 아버님은 우리가 앞둔 이 일을 ‘그깟 간 기증’ 따위로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다.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우리 부모는 겨우겨우 그분의 전화 한 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날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지금껏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가 가장 못 견디게 괴로웠던 건 수술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아니었다. 바로 병에 걸린 아들의 절망과 며느리의 희생을 대하는 시아버지의 안일하고 무책임한 태도였다.


이렇게 계속 견디기만 해야 하는 걸까. 끝은 어디일까.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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