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진 Aug 10. 2020

당신의 누드는 평화로운가요?

부끄러움보다 자연스러움으로 충만한 유럽 스파 문화

재작년 여름,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로 유명한 바로 그 폼페이를 방문했다. 나폴리와 소렌토, 아말피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중서부 여행 일정 중 하나였다. 저 멀리 무심하게 서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79년 8월 24일 엄청난 용암과 화산재를 분출하자 평화롭고 화려했던 고대 도시는 한순간에 파묻혔다. 수백 년 동안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진행하여 현재 80% 정도의 유적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나는 폼페이의 유적을 따라 걸으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도시 곳곳에 목욕시설, 지금으로 치면 스파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귀족의 호화스러운 개인 목욕탕을 비롯하여 스타비아 대중탕과 포룸 대중탕 그리고 화산 폭발 당시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던 중앙 대욕탕까지 고대 로마시대의 찬란했던 스파 문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유럽에서 스파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고대와 중세, 근대를 거쳐오면서 당대의 종교와 문화에 따라 어느 정도 부침은 있었지만, 시민들이 이용하는 스파의 수요는 꾸준히 확대되었다. 1년에 6개월 이상이 음산하고 쌀쌀한 유럽 특유의 날씨도 스파를 즐기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유럽에 2년 동안 거주하면서 많은 스파를 체험했다. 미네랄 온천수에 몸을 푹 담고 일상의 피로를 풀며 천상의 행복을 느꼈다. 편백나무 냄새 물씬 배어있는 건식 사우나에서 온 몸을 달구고 나서 찬 물에 샤워하며 날아오를 듯한 상쾌함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국이 성인 남성 위주의 실내 사우나 스타일이라면, 유럽은 성인 남녀가 함께 즐기는 노천 스파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기억이 남는 것은 누드 스파에서 원초적인 모습으로 수영과 사우나를 하고 선탠을 즐기기도 하면서 보낸 시간들이다. 부끄러움보다 자연스러움이 충만하고,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만의 해방감을 만끽하는 자연주의 문화의 상징, 유럽의 스파 세계로 들어가 보자.


누드 스파를 처음 경험한 짜릿한 순간

 

유럽에서 스파는 사우나와 온천, 수영과 선탠, 산책과 휴식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스파(spa)라는 단어는 벨기에 동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도시 스파에서 유래했다. 이곳은 예로부터 맑고 깨끗한 천연 미네랄워터가 풍부해서, 이 지역 온천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여기서 만들어진 생수 역시 '스파'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데 벨기에에서는 에비앙과 함께 비싸면서 맛있는 고급 브랜드로 손꼽힌다.


벨기에의 소도시 스파가 광천수로 유명해진 것은 14세기부터다. 1654년 영국 국왕 찰스 2세가 이곳에 머물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918년에는 독일군이 최고사령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1950년대 이후 아름다운 온천 휴양지로 소문이 나면서 지역 주민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벨기에 브뤼셀에 거주하던 2013년 가을, 나는 가족과 함께 리에주 스파 지역을 여행하면서 이곳의 대표 온천을 찾아갔다. <Thermes de Spa>, 직역하자면 '스파의 열탕'이다. 스파의 원조격인 이곳에서 미네랄 듬뿍 담긴 천연수에 몸을 담그고 진정한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화려한 원통형의 실내 온천과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노천탕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실내 온천의 다양한 시설들을 구경하러 돌아다니다 보니 2층에 성인들만 출입 가능한 누드 스파가 있었다. 조그마한 온탕 2개와 사우나 룸, 샤워부스로 구성되어 있고, 가족이나 연인들이 담소를 나누며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예전에 누드 스파를 몇 번 경험했었기에, 나도 낯선 유럽인들 옆에서 태곳적 아담의 모습으로 돌아가 심신의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벨기에 리에주의 소도시 스파의 명물 <Thermes de Spa>. 실내와 야외가 아름답게 연결되어 있다. 


브뤼셀에 살면서 주말이 되면 가끔 교외 지역의 스파를 방문해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찾아간 스파마다 전반적인 인테리어가 매우 세련되면서도 자연 친화적이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개성 있는 시그니처를 유지하면서, 스위밍 스파와 누드 스파를 구분하여 사람들이 취향에 맞게 즐길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했다.   


사실 스위밍 스파에서 놀다가 누드 스파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 나는 내색은 안 했지만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놀랐다. 가까이에 있는 버블탕에 얼른 몸을 담그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께 탕에 있는 사람들과 그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 선탠 의자에 앉아 편히 쉬는 사람들 모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누드 상태였다.


유럽에 혼탕 문화가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실제로 내가 그곳에 있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호기심으로 찾아갔건만 정작 할머니 할아버지만 있었다는 정보도 부정확했다. 물론 그런 곳도 있지만, 내가 간 누드 스파에는 젊은 층과 중년의 남녀들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몸이 흥분해서(?) 탕 속에 몸을 감추고 애국가를 숨죽여 불러야만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몇 차례 더 방문하면서, 내 발걸음은 스위밍 스파보다 누드 스파를 먼저 향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알몸을 본다는 시각적 흥분과 내 알몸이 보인다는 본능적 창피함이 자연스럽게 사라진 후, 나에게는 세상에 이보다 더 할 수 없는 해방감이 찾아왔다. 벌거벗은 몸으로 수영을 하며 태아 시절 엄마 자궁 속을 떠다니던 자연 그대로의 편안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누드 문화가 등장한 사상적 배경 


문화적으로 유러피언들은 인간의 나체를 자연스럽게 접해 왔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과 조각상 중에는 남성의 성기나 여성의 가슴이 섬세하게 묘사된 작품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예술작품 앞에서 외설스럽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벗은 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운 굴곡선과 강인한 근육은 예술적 상상력의 근원이 되었다.


사상적으로는 독일에서 시작된 나체주의(Freikörperkultur, 약어로 FKK) 운동이 유럽의 공개적인 누드 문화 확산에 일조를 했다. 1898년 창설된 FKK는 인간의 근본적인 수치심과 옷을 통해 과시되는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 탈피하여 건강하고 자유로운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대항문화 운동이다. 베를린에서 시작해서 발트해 연안 국가들로 확산되었다. 


1960년대 프랑스 68 혁명의 여파와 페미니즘의 확산도 일상 속 누드를 바라보는 시선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국가권력의 간섭과 통제를 거부하고 자유분방한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남성과 동등한 권리와 대우를 요구하는 페미니즘 문화는 남성 중심의 마초 문화에 위축되지 않는 성 평등 사회를 지향한다.


하지만 내가 유럽에 살면서 경험한 사실은 거창하게 FKK 운동을 주창하거나 페미니스트임을 강조하기에 앞서 대부분의 유러피언들이 일상적으로 아무런 거부감 없이 누드 스파를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비엔나에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주민 전용 수영장과 사우나가 있다. 당연하게도 사우나와 탈의실, 샤워실 모두 남녀공용이다.


내가 사는 비엔나 아파트의 주민 전용 누드 사우나. 2~3명이 함께 앉거나 누워서 건식 사우나를 즐긴다.  


오스트리아 유명 도시와 지역을 여행하면서 머물렀던 호텔에도 스위밍 풀장 옆에는 항상 남녀공용 사우나가 존재했다. 습식과 건식 사우나 앞에는 입고 온 가운과 수영복, 안경 등을 보관하는 별도 공간이 있다. 의자 바닥에 까는 큰 타월 한 장만 갖고 사우나에 들어가서 10분 정도 누워있으면 이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다.


비엔나에 살면서 내가 즐겨 간 스파는 비엔나 남쪽 오벌라에 위치한 <Therme Vien>이란 명칭의 스파다. 비엔나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수영장과 사우나가 자연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인만 출입이 가능한 사우나에는 누드로 수영과 사우나를 하고, 선탠과 산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숲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한여름에는 선탠 의자에서 누워서 햇빛을 즐기고 있는 네이키드 비에니즈들을 언제든 볼 수 있다.


이제 유럽의 스파 문화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오감을 만족시키며 최대한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이번 여름 가족 여행을 다녀온 오스트리아 티롤 지역에는 알프스 산맥을 바라보며 온천을 즐길 수 있는 모던 스파 호텔 <아쿠아돔>이 있다. 5만 평방미터의 드넓은 대지에 미래 도시 같은 탁월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이곳을 방문하자, 스파를 통한 힐링 시설의 끝판왕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Therme Vien> 2층에 위치한 누드 사우나에는 숲을 배경으로 편안하게 힐링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들이 준비되어 있다.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 지역의 외츠탈 계곡 마을인 랭겐펠트에 위치한 스파 호텔 <아쿠아 돔> 


타인의 몸을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사회


한국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은밀한 신체부위를 지하철에서 또는 화장실에서 몰래 촬영하다가 발각되어 구속되었다는 뉴스가 가끔 나온다. 바바리맨처럼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노출시켰다가 검거되는 경우도 있다. 평범한 일반인부터 운동선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전문직 종사자 등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남성들이 관음증이나 노출증 유혹에 빠져 인생을 망치곤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몸을 안 보여주겠다는 사람을 굳이 훔쳐보려는 심리와, 어떻게 해서든지 타인의 몸을 안 보겠다는 사람 앞에서 굳이 자신의 몸을 보여주려는 욕망. 이 모두가 개인의 잘못된 일탈행위인 동시에 인간의 몸을 과도하게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문화의 슬픈 자화상이다.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누드 스파와 사우나를 즐기고 있지만, 이로 인해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은 없다. 각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힐링 시간을 갖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시선의 처리다. 유럽 누드 문화의 불문율 중 하나는 절대 상대방의 몸을 뚫어지게 응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처음 누드 스파를 경험했을 때,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주체하지 못해서 고생을 했다. 어느 정도 적응한 후에는 자연스럽게 아웃 오프 포커스가 되어 무심한 시선 처리가 가능해졌다. 조금 더 익숙해지니 같은 공간에 아름다운 미녀가 누워 있어도 나 역시 편하게 눈감고 누워서 사우나를 즐길 만큼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 버블탕에 벌거벗은 몸으로 앉아 처음 보는 유럽 아줌마와 수다를 떨 정도로 내공이 깊어지기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몸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지도 않고 질색할 정도로 추하지도 않다. 포르노그래피로 과열된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불편한 시선들이 사라진다면,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는 획일화된 미의 기준이 개성 있는 건강함으로 바뀔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몸을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서로의 누드를 보다 평화롭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전 07화 도나우강에서 맞이하는 일상의 행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