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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Sep 15. 2020

건강한 일상의 중심, 유럽 생활스포츠의 매력

국가 주도 체육정책과 시민 참여 스포츠클럽의 절묘한 조화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뛰어넘어 '플렉스'할 수 있는 화려한 삶이 목표인 사회에서는 건강하고 여유로운 일상이 오히려 사치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돈 벌기도 바쁜데"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복지를 갖추지 못한 나라에서 당장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모든 가치의 중심이 돈에 있다고 굳게 믿는 대다수 사람들 역시 과도한 스트레스 속에 쫓기듯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내가 유럽에 살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서울에서 늘 보아온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는 집도, 타고 다니는 차도 평균에서 높낮이 차이가 크지 않았다. 부양가족과 소득 수준에 따라 40% 이상을 세금으로 내고, 다수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사회복지 시스템을 선택한 유러피언의 삶은 소박하고 단순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에도 눈에 띄는 시설이 있었으니, 도시 곳곳에 지어진 스포츠센터다.


사실 숲과 공원이 많고 동네 어귀마다 잔디밭이 있는 유럽에서는 주위 환경 자체가 운동공간이다.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이고, 야외 공터마다 축구, 농구, 배구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어딜 가나 발견할 수 있는 실내 스포츠센터에서는 피트니스와 수영을 물론이고 테니스, 배드민턴, 하키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건강한 일상을 위해 그리고 소박한 삶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모든 시민들이 생활스포츠에 흠뻑 빠져 있는 유럽의 모습을 함께 들여다보자. 


독일과 프랑스, 생활체육 선진국으로 우뚝 서다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생활스포츠가 가장 잘 운영되고 있는 나라가 독일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체육정책과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운영하는 스포츠클럽이 조화를 이루면서 대다수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 국민의 30%가 지역 스포츠클럽에 가입해 있고, 사설 스포츠센터나 비공식적으로 조직된 모임에서 또는 개별적으로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생활체육 참여 비율이 70%를 웃돈다. 


이처럼 독일이 생활스포츠 모범국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 데에는 1950년대 후반부터 강력하게 추진한 지원정책과 홍보 캠페인이 큰 역할을 했다. 1959년에 선언한 '스포츠 제2의 길'은 성과 지향의 엘리트 체육에서 건강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생활체육으로 관심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1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생활체육 기반시설 확충사업은 이른바 '골든 플랜'의 취지를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감시켰기에 가능했다.   


'골든 플랜'의 정식 명칭은 ‘건강, 놀이, 기분 전환을 위한 골든 플랜’(Goldener Plan für Gesundheit, Spiel und Erholung)이다. 막대한 재원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구현되는 시민들의 건강 증진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자산이라는 의미에서 '골든'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1961년부터 1976년까지 170억 마르크를 투입하여 독일 전역에 3만여 개의 종목 경기장과 실내체육관, 5400개의 수영장, 3만 개 이상의 어린이 운동장을 설립했다.


독일의 생활체육은 유소년을 비롯해 전체 국민의 30% 이상이 가입한 스포츠클럽에서 비롯된다. 


이와 함께 독일은 스포츠클럽을 통한 생활체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직장인들은 오후 4~5시에 퇴근하면 곧장 스포츠클럽으로 간다. '골든 플랜'에 의거하여, 집에서 도보로 10분 이내의 거리에 크고 작은 규모의 체육시설이 있기 때문에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초보자들은 클럽 소속의 자원봉사자에게 자세히 배울 수 있다. 시민들은 이곳에서 운동도 하고 이웃끼리 가볍게 맥주도 마시며 친목을 도모한다. 현재 독일에는 이런 스포츠클럽이 10만 개 이상 존재한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쿠베르탱의 조국, 프랑스 역시 대표적인 생활스포츠 강국이다. 프랑스는 정부조직에 체육부가 단독으로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을 함께 육성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종목별 체육협회는 스포츠클럽에서 우수한 기량을 보인 사람들을 선발하여 대회에 출전시킨다. 프랑스 올림픽위원회와 중앙체육협회는 이들 가운데 발군의 실력을 보인 선수들을 전문적으로 육성한다.


프랑스의 생활스포츠는 학교체육과도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최대한 다양한 운동 종목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부족한 부분은 방과 후 스포츠클럽 활동을 통해 보충하도록 한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대부분의 학교가 수업 대신 지역 스포츠클럽에서 원하는 운동을 하도록 한다. 학생들은 최소한 세 가지 종목을 선택해서 실력을 연마하고 평가를 받아야만 졸업할 수 있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 중에서 수영장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인구 1만 명 이상 되는 소도시에는 의무적으로 수영장이 설립되어 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지역 시민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게 주택가와 인접하여 체육시설을 마련해놓았다. 이를 통해 일반 시민뿐만 아니라 노인과 장애인들도 차별 없이 운동을 하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독일과 프랑스 이외에도 내가 살았던 벨기에와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많은 유럽 국가들은 1960~70년대부터 생활체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프라 건설에 매진했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상에 여유가 생긴 유러피언들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스포츠센터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운동을 즐기게 되었다. 또한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는 비영리 스포츠클럽은 생활체육 활성화를 위한 풀뿌리 같은 존재로서, 동네 사랑방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유럽에 살며 스포츠 체험에 푹 빠지다


내가 유럽에서 생활하며 직접 체험한 생활스포츠는 테니스와 승마 그리고 배드민턴이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은 축구와 테니스, 농구, 배구 등이다. 배드민턴과 하키도 포함된다. 여기에 나라별로 특정 스포츠를 선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럭비와 크리켓, 프랑스의 도로 사이클, 북유럽 국가들의 스키 등.   


참고로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인 야구는 유럽 사람들에게 생소한 운동이다. 브뤼셀에 살 때, 공원 잔디밭에서 아이와 글러브를 끼고 캐치볼을 하곤 했는데, 그 넓은 잔디언덕에서 야구놀이를 한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곳의 어린아이들은 야구 자체를 몰랐다. 이들에게는 함께 모여서 공을 차고 노는 축구가 최고의 스포츠였다.   


유러피언들이 축구만큼 좋아하는 스포츠가 테니스다. 웬만한 테니스 전용 스포츠센터에는 야외와 실내에 코트가 설치되어 있다. 브뤼셀에 살면서 내가 레슨을 받은 윔블던 테니스클럽(Wimbledon Tennis Club) 역시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매주 수요일 저녁에 1시간 동안 레슨을 받았는데, 교육생이 나를 포함해 3명뿐이어서 거의 1:1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에 레슨비는 시간당 20유로(약 3만 원)로 저렴했다. 


브뤼셀 시절, 내가 테니스를 배우고 즐겼던 윔블던 테니스클럽의 실내 코트


한국에서는 귀족 스포츠로 여겨지는 승마가 유럽에서는 일반 시민 누구나 즐기는 대중스포츠다. 나는 브뤼셀 교외 한적한 동네에 있는 승마장에서 주말마다 아이들과 승마를 배웠다. 레슨비는 테니스와 마찬가지로 시간당 20유로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교육을 받다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부터는 우리 3명이 함께 훈련을 받았다. 말과 혼연일체가 되어 엉덩이를 업다운하면서 달리다 보면 온몸에 땀이 베이곤 했다.


유럽은 자동차산업보다 말 관련 산업이 더 발달했다고 할 정도로 승마에 대한 관심이 깊다. 에르메스와 폴로, 구찌 등 유럽의 명품 브랜드들은 승마로부터 사업 아이템을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비엔나에는 1565년에 설립된 스페인 승마학교가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난도의 전통 승마술을 관람할 수 있다. 말과 교감을 하면서 자세교정과 허리 강화 효과가 있는 승마야말로 유럽의 대표적인 생활스포츠다.


브뤼셀 시절, 아이들과 내가 실내연습장에서 승마를 배우고 있는 모습


비엔나에서 아이와 함께 다닌 곳은 집 근처 맥스 스포츠센터(Maxx Sportcenter)다. 전형적인 동네 스포츠클럽인 이곳에는 실내에 테니스와 배드민턴장이 있고 야외에는 비치발리볼 경기장을 갖추어 놓았다. 우리는 주로 배드민턴을 했는데, 아이들 방학 기간인 7월과 8월 두 달 동안에는 여름 프로모션을 이용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1인당 40유로만 내고 두 달 내내 언제든 코트를 예약해서 이용할 수 있었다.


우리 아이는 비엔나에서 만난 또래 한국 친구들과 배드민턴 그룹레슨을 받았다. 알렉스 왕이라는 선수 출신 코치에게 6주에 거쳐 매주 1시간씩 배웠는데, 시간당 레슨비가 17유로 정도였다. 기본적인 스매싱 자세부터 서브와 드라이브, 헤어핀까지 다양한 기술을 배우며 즐겁게 게임을 했다. 마지막 레슨 날, 알랙스 왕은 자신의 로고가 새겨진 배드민턴 전용 티셔츠를 선물하며 우리 아이를 격려해주었다.


비엔나 맥스 스포츠센터에서 우리 아이와 친구들이 배드민턴 레슨을 받고 있는 모습


원래 스포츠를 좋아하지만, 한국에서는 직접 운동을 하기보다 텔레비전으로 시청하거나 경기장에서 관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저 하루에 1만 보 이상 꾸준히 걷고, 이틀에 한 번꼴로 아파트 지하에 있는 피트니스에 가서 스트레칭 중심으로 운동을 했다. 하지만 유럽에 사는 2년 동안 나는 한국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도전하지 못했던 다양한 스포츠를 배우고 즐겼다.


내가 살았던 벨기에와 오스트리아를 비롯해서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주요 국가들은 사회복지 차원에서 생활체육 시설을 곳곳에 마련하고 지역단위 스포츠클럽을 지원한다. 접근성이 용이하기에 누구나 손쉽게 스포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스포츠클럽에서는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레슨을 하고 다양한 친목 도모 활동을 한다. 여기에는 적극적인 자원봉사와 투명한 회계가 당연히 뒷받침되어 있다. 


복지국가의 최우선 정책은 생활체육 활성화


기초적인 수준의 사회복지가 연금과 건강보험이라면, 적극적인 차원의 사회복지는 시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생활스포츠 시설을 확충하는 것이다. 단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꾸준히 운동을 하고 뜻 맞는 동호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진작부터 생활체육 활성화를 정책의 우선순위에 두었다.   


한국은 기나긴 권위주의 군사독재 시절에 엘리트 체육 육성을 통해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경제가 발전하고 중산층이 확대되면서 생활체육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지역마다 경쟁적으로 스포츠센터가 건립되었고, 종목별 동호회 중심으로 연습과 시합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는 유럽에 비해 생활스포츠 역사가 짧다 보니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수준이 다소 부족한 게 사실이다. 생활체육과 엘리트 체육 그리고 학교체육 간 칸막이가 뚜렷하여 유기적인 연계와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도 안타깝다. 이런 가운데 한편에서는 고액의 강습료를 지불하는 개인 PT와 필라테스 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한국에서 생활스포츠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부 거버넌스의 개선이 필요하다. 프랑스처럼 체육을 전담하는 행정부처가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문화와 체육과 관광을 순환 근무하며 체육정책을 집행하는 시스템에서는 현장 전문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스포츠 발전을 위한 치열한 고민이나 애정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독립된 체육전담 부처에서는 학교와 생활체육 그리고 국가대표를 위한 엘리트 선수 육성을 종합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회복지 차원에서 시민들이 건강하게, 행복하게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스포츠센터를 설립하는 것은 기본이고, 트레킹을 위한 둘레길을 개발하고 공원과 녹지를 확충하여 자연스럽게 신체를 단련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 좋겠다.


내가 즐겨 산책하는 비엔나 슈타트파크에는 10명 남짓 잔디밭에 둥글게 모여 앉아 요가와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 같은데 어떨 때는 가만히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생활체육이 슈타트파크의 요가 수업처럼 누구나 손쉽게 참여해서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건강한 일상 속 모습이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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