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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Sep 19. 2020

유럽 먹거리에서 발견한 새로운 맛의 세계

벨기에 홍합요리와 비엔나 슈니첼, 향신료와 소스로 풍미를 더하다

한국의 '먹방' 열풍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예전에는 아침시간에 방송되는 오늘의 요리나 맛집 탐방 프로그램이 전부였다면, 지금은 음식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요리 대결과 식당 컨설팅부터 연예인이 일반 가정집을 방문하여 무작정 한 끼 달라는 콘셉트까지 매우 다양하다. 먹방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TV와 유튜브 등 인터넷 방송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먹는 장면만 보여주기도 한다.


주방에서 뜨거운 불에 데고 칼에 베이며 고생하던 요리사가 이제는 셰프라는 이름의 선망받는 전문직으로 변모하여 많은 청소년들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어려서부터 꽤나 음식 투정 심했을 것 같은 까탈스러운 성격의 미식가가 현재는 영향력 있는 맛 칼럼니스트가 되어 일반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셀럽의 세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음식과 요리에 거의 목숨을 건 것 같은 한국을 떠나 오스트리아에 온 지도 이제 7개월이 지나간다. 이래저래 유럽에 거주하고 여행한 기간을 합치면 2년이 훌쩍 넘는다. 누구 못지않게 한국 음식을 좋아하지만, 유럽에 살면서 맛본 이곳의 먹거리는 나에게 새로운 맛의 세계를 알려주었다. 슬로 푸드와 채식주의자를 배려하는 음식문화에서 여유롭고 취향을 존중하는 유럽만의 식도락을 배울 수 있었다.       


이 글은 단순한 여행길 현지 음식 소개가 아니라, 실제로 유럽에 살면서 내가 체험한 그들만의 식재료와 조리방법 그리고 음식에 담긴 문화 이야기다. 1년 이상 거주했던 벨기에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나에게 새로운 차원의 맛을 선사한 유럽 먹거리의 세계에 당신을 초대한다. 


쉐즈 레옹의 뮬 요리와 플라후타의 타펠슈피츠


나는 벨기에 브뤼셀에 1년여 거주한 적 있다. 벨기에는 우리나라 경상도 크기의 작은 국가인데, 그나마 남쪽 왈로니 지역은 프랑스어를, 북쪽 플랑드르 지역은 네덜란드를 사용하며 틈만 나면 분리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도무지 나라 같지 않은 이곳에는 유럽연합 본부와 의회를 비롯하여 많은 국제기구들이 위치해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유럽 최고의 미식 국가인 프랑스 못지않게 맛있고 화려한 먹거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브뤼셀 중심에는 빅토르 위고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칭송한 그랑 플랑스가 있다. 직역하자면 거대한 장소인데 사실 광장 치고는 작고 아담한 편이다. 참고로 브뤼셀에서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오줌싸개 동상 역시 너무 작아서 발견하기 쉽지 않다. 브뤼셀에서는 뭐든지 작은 게 아름다운가 보다. 어쨌든 그랑플랑스를 걷다 보면 홍합요리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하는 레스토랑, 쉐즈 레옹(chez Leon)을 만날 수 있다.


레옹의 대표 메뉴인 홍합찜. 프리츠라 불리는 감자튀김이 함께 나온다


홍합은 영어로 머슬(mussel), 불어로 뮬(moule)이라고 부른다. 레옹의 메뉴판에는 뮬을 재료로 해서 만든 다양한 요리들이 소개되어 있다. 나는 2명 이내로 방문하면 홍합찜을 시키고, 3명 이상이면 홍합 그라탕을 추가해서 먹곤 했다. 카세롤이라 불리는 전용 냄비에 담겨 나오는 홍합찜은 네덜란드 바닷가에서 잡힌 싱싱한 홍합에 화이트 화인, 버터, 샐러리를 넣어 풍미를 더한다. 파슬리와 페페론치노를 곁들이면 향과 맛이 더욱 깊어진다.


아무리 맛있어도 홍합요리만을 먹기에는 느끼하고 짭짜름하기에 프리츠(Frites)라 불리는 벨기에식 감자튀김과 바게트 빵, 프레첼 등이 함께 나온다. 단골 식당인 레옹에서는 어린이용 홍합탕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한다. 벨기에 홍합요리의 원조격인 쉐즈 레옹은 레옹 드 브뤼셀이라는 브랜드로 파리와 로마를 비롯한 유럽 주요 도시에 브랜치를 두고 있다. 특히 프랑스에는 80여 개의 레옹이 성황리에 영업 중이다.       


지금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는 라틴계열 국가인 프랑스와 벨기에보다 맛의 섬세함이나 화려함이 조금 떨어진다. 비엔나 슈니첼(Vienna Schnitzel)이나 바비큐 립 요리가 유명하지만, 미식가의 관점에서 보면 투박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들여다보면, 중부 유럽을 대표하는 스테이크 요리의 다채로운 조리법과 특유의 맛과 향을 감상할 수 있다. 


먼저 우리가 먹는 돈가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비엔나 슈니첼은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에 밀가루와 빵가루를 발라서 튀긴 음식이다.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독일, 스위스, 체코 등 중동부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노라면 어디서든 슈니첼을 맛볼 수 있다. 레몬을 충분히 뿌리고 링곤베리 잼을 발라서 먹으면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듯한 느낌이 든다. 여기에 감자 샐러드와 수제 맥주를 곁들이면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한 끼 식사가 완성된다. 


레몬 조각이 얹어진 비엔나 슈니첼과 파슬리로 맛을 낸 감자 샐러드


유럽에서 조리하는 대부분의 스테이크 요리가 불에 굽거나 튀기는 방식인데 비해, 오스트리아 전통음식인 타펠슈피츠(Tafelspitz)는 특이하게도 고기를 뜨거운 물에 익힌다. 어린 수소의 부드러운 엉덩이살을 조금 건조한 후 감자와 각종 채소를 함께 넣어 육수에 푹 삶아 조리하는 타펠슈피츠는 얼핏 보면 우리 갈비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고기를 찍어 먹는 소스로는 고추냉이 맛 가득한 홀스래디쉬가 적격이다.


내가 타펠슈피츠를 즐겨 먹는 장소는 비엔나 오페라하우스 근처에 있는 플라후타(Plachuttas Gasthaus zur Oper)라는 레스토랑이다. 햇살 좋은 날, 식당 앞에 설치된 야외 테이블에 지인들과 함께 앉아서 부드러운 질감의 소고기와 시원한 국물을 함께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꼿을 피우곤 했다. 음료는 맥주나 탄산음료를 마시는데,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알름두들러라는 자국 탄산음료를 콜라보다 더 좋아한다.   


감자 샐러드와 소스를 곁들인 오스트리아 전통요리 타펠슈피츠

 

유럽 음식의 3대 요소 : 건강한 식재료, 향신료, 소스


유럽에서 음식을 먹다 보면 한국처럼 푹 우려내거나 오랜 시간 발효 숙성시킨 맛을 발견하기 힘들다. 냄비에 고기를 삶아서 나오는 타펠슈피츠도 우리의 설렁탕이나 곰탕과 비교하면 맑고 가벼운 국물 정도다. 하물며 대표적인 발효음식인 김치의 아삭아삭하면서 시큼한 맛을 대체할 만한 밑반찬은 어디서든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유럽의 대표음식들은 어떤 방식으로 맛과 향을 만들어낼까?


나는 그 비법을 건강한 식재료 그리고 향신료와 소스에서 찾는다. 유럽은 기후와 지형에서 축복받은 대륙이다. 찜통더위와 칼추위가 거의 없는 온화한 사계절에 태풍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도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국토 대부분이 완만한 평야지대로 구성되어 있어 농업과 목축에 적합하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방목과 유기농 방식으로 재배하고 사육한 식재료들이 얼마나 신선할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브뤼셀에 살면서 아침에 바게트 빵을 먹을 때 한국에서 사 먹는 빵과 모양은 큰 차이가 없는데 맛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란 적이 여러 번 있다. 루벤 대학 근처에 있는 유명한 와플가게에서 주문한 와플을 먹는 순간 '이래서 벨기에 와플이 원조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비엔나에 있는 맥도널드 매장에서 파는 빅맥버거가 유난히 맛있는 이유도 패티에 들어가는 고기의 퀄리티 때문이다.


유럽 음식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또 다른 비결은 다양한 풍미의 향신료와 소스를 음식과 궁합이 맞게 적절히 가미하기 때문이다. 사실 향신료를 별로 활용하지 않는 한국 음식에는 그나마 후추와 생강이 주로 애용되고 있지만, 유럽에는 정말 다양한 향신료가 존재한다. 시나몬, 클로브, 메이스와 넛맥, 아니스, 파슬리, 바질, 오레가노, 로즈메리, 샤프란, 파프리카 등.


비엔나의 웬만한 대형마트에는 향신료 코너가 별도로 있다


소스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대표 음식인 파스타 소스만 해도 볼로네즈, 페스카토레, 까르보나라, 봉골레, 페스토, 알리오 올리오 등이 있어서 면 종류와 첨가되는 재료 성격에 따라 궁합에 맞는 조합을 선택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스테이크를 먹을 때, 미국 크래프트 푸드사에서 제조한 A1 소스를 주로 이용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데미글라스, 그레이비,  샤토브리앙, 포트와인, 우스터, 홀그레인 머스터드 등의 소스를 취향에 맞게 찍어 먹는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김치를 대체할 만한 유럽 음식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기본적인 밑반찬으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면 올리브와 피클이 유력한 후보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재배된 고급 올리브는 맛이 일품이다. 발효식품으로서의 가치에 주안점을 둔다면, 치즈가 겨룰 만하다. 이탈리아가 원산지인 파르메산 치즈의 경우, 최소 1년 이상의 발효숙성 과정을 거쳐 제조된다. 유럽에서 치즈는 요리 재료이자 와인 안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발효와 숙성의 감칠맛 뛰어난 한국 음식


나는 우리가 세상에 선보인 가장 탁월한 발명품이 글과 음식, 즉 한글과 한식이라고 생각한다. 글로벌 컬처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한류의 뿌리는 한글로 만들어진 이야기 문화다. 한글의 아름다움과 독창성에 기반을 둔 우리만의 서사와 음률이 있었기에 다양한 장르의 대중문화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조상의 지혜로 영글어진 우리만의 맛깔스러운 음식문화는 현대적인 감각이 더해지면서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음식 수준이 뛰어나다는 것은 먹는 사람의 미각을 황홀하게 자극한다는 뜻이다. 복합적이면서 뭐라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맛을 느꼈을 때, 우리의 표현력 역시 그에 상응해서 발전하기 마련이다. 


우리만큼 맛을 표현하는 용어가 다양한 나라가 없다. 구수하다, 삼삼하다, 칼칼하다, 쌉싸래하다, 시큼하다, 달착지근하다 등의 표현을 과연 어느 나라 언어가 제대로 번역할 수 있을까? 깊게 우려낸 맛이나 혀가 얼얼한 맛을 느낌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외국어 문장이 가능할 수 있을까? 


외국 생활을 하는 한국 사람들이 한식을 잊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 요리해 먹거나 사 먹는 이유는 단지 익숙해서가 아니다. 발효와 숙성을 통해 만들어진 특유의 감칠맛을 세계 그 어떤 음식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에 살면서 경험한 이곳의 음식문화 역시 우리 못지않게 풍성한 재료와 다양한 조리법을 자랑하고 있었고, 여기에 향신료와 소스를 적절하게 가미하여 풍미를 더했다.


유럽 음식과 한국 음식을 비교하는 자료를 살펴보면, 과도하게 유럽 음식에 감탄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우리 음식을 찬양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우리와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그들만의 레시피로 조리한 유럽 음식은 나에게 새로운 맛의 세계를 알려주었고 미각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와 동시에 나는 여전히 한식을 좋아하고 우리 먹거리가 선사하는 깊고 풍부한 맛에 매료된다.


입맛만큼 사람마다 취향이 제각각인 건 없을 것이다. 익숙한 음식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고, 새로운 요리에서 호기심을 충족할 수도 있다. 다만 각자의 미감은 존중하되,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유럽의 색다른 먹거리와 음식문화를 넉넉한 마음으로 음미한다면 새로운 맛의 세계를 발견하는 기쁨을 조금 더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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