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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Oct 02. 2020

나는 오늘도 도나우강가를 걷는다

다름에서 배움을 찾는 유럽 여행의 종착역

고백하지만, 나는 멀리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익숙한 환경에서 반복된 일상을 사는 게 편안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가끔씩 해외출장을 다녔지만 원해서 간 경우는 별로 없었다. 가족과 함께 외국여행을 가는 것은 그나마 즐거웠지만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이었다. 잠자리가 바뀌는 것도 싫었고, 하루 종일 움직여야 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러던 나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1주일 정도의 여행이 아닌, 1년 동안이나 외국 도시에서 거주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주위에 익숙해지면서 예전에 전혀 느끼지 못했던 힐링의 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년이 흐른 뒤 외국 생활의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 이번에는 떠나기 전부터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하면 유럽에서 재밌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실토하지만, 나는 많이 걷는 것을 힘들어했다. 직장에서는 주로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연구하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고 집에 돌아와서는 TV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했다. 휴일에는 멀티플렉스에 가서 영화를 보고 맛있는 음식을 사 먹으며 소일했다. 종아리에 알이 배길 정도로 걷고 뛰거나, 땀이 날 정도로 운동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용불용설에 의해 나의 하체는 갈수록 약해져만 갔다.


그러던 나에게 계기가 다가왔다. 지인의 권유로 웨어러블 헬스 디바이스 핏빗(Fitbit)을 구입하고 매일 1만 보 이상, 8킬로미터 이상을 걷기 시작했다. 걷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수많은 책들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 도전해야지 마음만 먹다가 마침내 실행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시작한 지 1년이 넘었고, 나는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목표량을 완수했다. 이제 걷는 것은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약속이자 원칙이 되었다.           


도나우 강을 거닐며 나만의 유럽 이야기를 쓰다


처음에는 외국 여행에 호기심이 없었고 걷기를 누구보다 싫어했던 나였지만, 지금 나는 비엔나에 살면서 매일 도나우 강변을 걷고 있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고, 여기에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면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변화의 순간은 찾아온다.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만 각자의 몫일뿐.


2013년부터 2020년까지 나는 브뤼셀과 비엔나에서 1년씩 살았고, 유럽의 많은 국가와 도시를 여행했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던 장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제 모습을 갖추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지금까지 내가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한 유럽과 한국을 비교하는 일을 시도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처음에 내가 의도했던 작업은 유럽의 도시공원을 주제로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비엔나로 떠나기 전, 책의 서문과 목차를 작성하고 관련 자료를 취합했다. 유럽에 1년 동안 체류하면서 일정에 맞춰 주요 도시의 공원을 답사하고 글을 쓰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코로나19로 인해 유럽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다른 국가 여행은커녕 오스트리아 내에서의 이동도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밀리의 서재>와 <브런치>는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락다운으로 집에서 삼시 세 끼를 해결해야 했던 암울한 시절, 나는 틈만 나면 2개의 지식정보 애플리케이션을 탐험하며 다양한 스토리를 설레는 마음으로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브런치>에 직접 글을 올리고 싶다는 마음이 불현듯 생겼다. 전공서적은 몇 권 출간한 경험이 있어도 대중적인 에세이를 쓰는 것은 처음이라 다소 긴장했지만, 운 좋게 작가로 승인받았다.


유럽의 도시공원을 답사하며 현장의 감흥을 받아 글을 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대신 <브런치>에 주기적으로 업로드하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가 직접 체험한 유럽 생활을 바탕으로 주제별로 글을 작성하되, 가급적 한국과 연결고리를 갖고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당연하게도 내가 <브런치>에 올린 첫 번째 글은 "유럽, 도시공원을 품다"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큰 고민 없이 술술 쓰이는 글이 있는가 하면, 주제를 결정하고 첫 문장을 작성하기까지 며칠이 걸린 글도 있었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머릿속에서 생각이 맴맴 돌 때마다, 나는 도나우강에 갔다. 우리 집에서 트램으로 세 정거장만 가면 알트 도나우에 도착한다. 강가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서 넘실거리는 강물을 무심히 바라보노라면 뭉쳤던 실타래가 풀리면서 조금씩 갈피를 잡아갔다.


 내가 오후에  즐겨 산책하던 도나우강 산책길


비엔나의 스카이라인과 조화를 이룬 도나우강 주변 풍경


도시에 사는 시민들에게 강은 소중한 자산이자 휴식 공간이다. 나는 도나우강가를 거닐며 비엔나의 문화와 자연을 음미했다. 이방인의 외로움이 밀려올 때에는, 정태춘이 <북한강에서>라는 노래에서 읊조렸듯이, 새벽녘 도나우강의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며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리를 생각"하기도 했다.          


비엔나 거리를 걸으며 도시의 매력에 빠지다


누군가 나에게 글을 쓸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걷기라고 대답한다. 물론 나는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대형서점에 들어가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삶의 활력을 느끼곤 한다. 인내심을 갖고 자리에 앉아서 습작과 퇴고를 되풀이하는 것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평정심과 체력이다.  


처음에 하루 1만 보 이상 걷겠다고 다짐했을 때, 나의 목표는 하체와 허리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트래킹을 가거나 등산을 할 때 혼자 낙오되어 민폐 끼치는 일만은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효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저절로 장 운동이 함께 되어 쾌변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머리가 맑아지면서 생각이 깊어졌다.


이제 나에게 걷기는 가장 소중한 일상이 되었다. 걷기 위해 특별한 장소는 필요 없다. 동네 골목도 좋고, 공원이나 숲 속 오솔길도 좋다. 내가 사랑하는 도나우강가를 걸을 때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걸으면서 억지로 무슨 생각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계속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저절로 생각이 떠오른다. 그 순간을 조심스레 간직해서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면 된다.


해 저물 무렵 나는 도나우강가를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유럽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비엔나는 완만한 평지로 어우러져 있다. 서울처럼 도심 한 복판에 남산이 있고 북한산과 도봉산, 관악산 등 600~800미터 높이의 암산이 솟아 있는 도시를 유럽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비엔나 외곽의 숲이 우거진 언덕을 트래킹 하다 보면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을 발견하곤 한다. 무심히 바라본 비엔나의 모습에는 내가 살아온 서울과 다른 그들만의 전통과 문화가 있다.


비엔나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는 3가지를 꼽자면, 첫 번째는 교회 십자가다.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이고 그다음이 무슬림인 종교 분포와 관련이 있겠지만, 적지 않게 존재하는 교회들 역시 붉은 십자가 조명을 밤새 밝히지 않는다. 두 번째는 고층빌딩이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오밀조밀하게 배치된 아담한 건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간혹 눈이 뜨이는 고층건물은 정부의 특별한 건축 허가에 따라 미학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지어졌다.


세 번째는 CCTV다. 정말 중요한 시설을 제외하고는 CCTV를 발견할 수 없다. 행정편의보다 시민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유럽의 가치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에 생각보다 큰 타격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도 아이가 다니는 국제학교에서 확진자 발생 소식을 이메일로 알려주는데, 몇 학년에서 발병했다는 정보만 있고, 나머지는 학생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달라는 강력한 요청으로 채워져 있다.


한국은 어딜 가든 CCTV가 설치되어 있고 신용카드와 휴대전화 사용내용을 전달받아 개인의 동선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에서는 어디서도 CCTV를 발견하기 힘들고 개인정보를 정부나 타인이 확인하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불법행위라고 여긴다. 그러다 보니 쓰레기를 무단 배출하는 일도 있고, 아파트 공용시설이 자주 고장 나기도 한다. 느리고 불편하고 심지어 큰 위험을 초래할지언정 프라이버시와 상호 신뢰의 가치를 지키려는 것이 유럽 문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2년 동안 경험한 유럽, 다름에서 배움을 찾다 


브뤼셀에서 비엔나로 도시를 옮겨가며 산 지 2년이 지나간다. 처음 1년은 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며 지냈다. 고민하고 분석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스펀지처럼 받아들였다. 의식주를 기반으로 한 유럽의 생활방식과 문화예술, 종교 등 내밀한 부분까지도 최대한 느끼고 체험했다. 북유럽을 제외하고 유럽의 동서남에 있는 이름난 도시와 섬들을 자유롭게 여행했다.


그다음 6개월 동안에는 내가 경험한 유럽의 모습과 한국의 상황을 찬찬히 비교해보았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니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다른 점 역시 제법 많이 발견되었다. 차이가 나는 것들 중에는 우리보다 뒤처져 있거나 별로 배울 게 없는 것들도 있었다. 큰 의미 없이 그저 다르기만 한 것도 보였다. 이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 나니 우리와 다르면서 그 안에서 뭔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주제들이 손에 잡혔다. 그 후 6개월 동안 나는 열심히 글을 썼다.


"다름에서 배움을 찾자" 내가 지난 1년 동안 고민하면서 글을 쓰게 된 동기다. 다름은 우월이 아니다. 지난 세월 켜켜이 쌓인 역사와 전통이 빚어낸 차이일 뿐이다. 다만 우리와 '다른' 그들의 국가운영 방식과 일상문화 속에서 우리가 참조할만한 시사점이 있다면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자부심과 자만심을 혼동하여 다름을 불편해하고 무시하는 태도는 국가와 시민을 퇴보시킨다.  


특히 코로나19라는 팬데믹 공포가 닥치면서 어느 지역보다 큰 타격을 입은 유럽의 시련과 좌절을 함께 겪으며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뉴스나 SNS를 통해 접하게 되는 피상적인 정보 그 이면에 담긴 모습을 공유하고 싶었다. 유러피언들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공동체를 유지하는 그들만의 정치 경제 시스템과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고 하는 생활 속 가치와 문화 등.             


보통 강의를 하려면 강의시간보다 10배 이상 준비를 해야 한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익숙한 분야도 있었지만 잘 모르는 주제의 글을 쓸 때에는 몇 주 이상 구글링을 하며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다. 하지만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한 편의 글이 완성되면 그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며 '다름 속 배움'에 조금이라도 공감을 한다면 나의 기쁨은 더욱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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