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누가 뭐래도 맥주의 본고장이다. 홉(hop)이 가미된 현대적 의미의 맥주가 처음 만들어진 곳이 바로 중세 유럽의 수도원이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맥주는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알코올 음료수 중 하나가 되었다.
크게 상면 발효와 하면 발효로 구분되는 맥주는 어떤 제조공정을 거치는지, 어떤 재료를 첨가하는지에 따라 50개 이상의 다양한 종류로 구분된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맥주 발효방식이 개선되고 냉장보관이 가능해지며 효모 배양에 성공함에 따라 맥주 품질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제조방식과 첨가재료의 창의적인 블렌딩을 통해 만들어진 다양한 수제 맥주를 맛볼 수 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맥주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물과 차 다음으로, 세상에서 세 번째로 많이 마시는 음료라고 알려진 맥주. 나는 유럽에서 맥주의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한국에서 경험하는 맥주의 세계가 2차원의 평범함에 머문다면, 유럽에서 체험하는 맥주의 세계는 4차원의 입체감을 안겨준다. 국가 단위에서 대량 생산되는 브랜드 맥주와 지역이나 술집 단위에서 소량 생산되는 크래프트 맥주가 저마다의 풍미를 자랑한다.
호프브로이를 둘러싼 웃픈 해프닝
맥주는 말 그대로 보리를 주원료로 사용한 발효주다. 영어 단어인 비어(Beer) 역시 곡물을 뜻하는 게르만어 비오르(Bior)로부터 유래되었다. 따라서 유럽과 미국은 맥주를 부르는 발음이나 철자가 거의 유사하다(독일어 Bier, 프랑스어 Biere, 이탈리어어 Birra 등). 아시아로 건너온 비어는 일본에서 비루, 중국에서 피이주, 한국에서 맥주로 불리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단어가 맥주 제조방식 또는 양조장을 의미하는 브루어리(Brewery)다. 독일어로는 브로이(Bräu)라고 한다. 예를 들어, 뢰벤브로이는 '사자가 만든 맥주 양조장"이라는 멋진 이름의 맥주집이다. 유럽에서 유명한 맥주집 이름에 브로이가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그렇다면 호프브로이(Hofbräu)는 무슨 뜻일까? 호프(hof)는 뜰이나 농장 또는 왕궁을 의미한다. 따라서 번역하자면 '드넓은 농장(또는 왕궁) 안의 맥주 양조장'이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호프브로이를 방문한 한국 사람이 브로이가 아닌 호프를 맥주로 착각하여(아마도 맥주의 주원료인 홉(hop)과 혼동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맥주집을 차리면서 '아무개 호프'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농장이나 왕궁을 뜻하는 호프가 엉뚱하게도 맥주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의 번화가에 즐비한 맥주집들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가게가 왕궁이라고 자랑하는 셈이다. 이 거리를 어느 독일 사람이 방문하게 된다면 한국에는 왜 이렇게 농장과 왕궁이 많은지 그리고 도대체 맥주는 어디서 마실 수 있는지 한참 고민하게 될 것이다.
대로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호프 간판. 맥주와 아무 상관없는 농장 또는 왕궁이라는 뜻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호프브로이, 정확하게 호프브로이 하우스는 실제로 존재하는 맥주집이기도 하다. 그냥 맥주집이 아니라 1589년에 설립된 세계에 가장 유명한 맥주 양조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집이다. 독일 뮌헨에 있는 호프브로이 하우스에는 손님 3천 명이 동시에 입장하여 다양한 바이에른 생맥주를 1리터짜리 커다란 맥주잔으로 마신다.
모차르트가 천재적인 음악성을 과시하며 일필휘지로 작품을 완성하던 시절, 호프브로이는 그에게 즐거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였다. "맛있고 훌륭한 맥주 앞에서 계급 간의 차이는 사라진다"라고 외쳤던 레닌에게도, 달변의 일장연설로 손님들을 선동했던 히틀러에게도 호프브로이는 변함없이 마스크 루크(1리터 맥주잔)와 바이스 부르스트(하얀 소시지)를 제공했다.
독일 바이에른주의 주도이기도 한 뮌헨은 그 유명한 옥토버페스트 개최도시이기도 하다. 1819년부터 연례행사로 자리 잡은 옥토버페스트는 전 세계 600만 명의 맥주 애호가와 관광객이 참석하는 세계 최대의 맥주 축제다. 6개 대표 양조사가 마련한 대형 천막 안에서 흥겨운 노래와 춤을 곁들이며 함께 마시는 생맥주의 맛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독일 뮌헨에서 매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개최되는 세계 최대의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
유럽 맥주, 오묘하고 깊은 맛의 세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철학이 꽃을 피운 이유 중 하나는 현자들의 치열한 토론에 부드러운 와인이 가미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술의 가치와 의미는 아테네 정신과 맞닿아있다. 하지만 내가 자란 한국 사회의 음주 문화는 죽도록 마시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다. 빨리 취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폭탄주가 만들어졌고, 거기에 맥주는 희석용 보조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나는 그토록 무시해왔던 맥주의 진가를 깨닫게 되었다. 벨기에에서 1년여 거주하는 동안에는 레페(Leffe)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1152년 벨기에 남부 레페 수도원에서 제조된 에비 에일(Abbey Ale) 계열의 레페는 블론드, 브라운, 루비, 트리펠 등 다양하게 제공된다. 레페 특유의 클래식한 문양이 새겨진 잔으로 레페 브라운을 마시며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던 추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유럽에 살기 전부터 나의 취향을 가장 잘 충족시켜 주었던 맥주는 사실 기네스(Guinness)였다. 한국 맥주의 평범함에 식상하여 아사히와 삿포로 등 맑고 청량한 일본 맥주를 즐겨 마시던 중 우연히 만난 기네스는 상상 이상이었다. 흑맥주 특유의 진하고 쓴맛과 함께 크림 거품의 우아한 자태는 목을 넘기는 쾌감과 눈으로 감상하는 즐거움을 함께 안겨 주었다.
오스트리아에 살게 되면서 나는 차원이 다른 유럽 맥주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오타크링거(Ottakringer)와 괴서(Gösser)처럼 비엔나의 대형마트에 가득 진열되어 있는 일반 맥주부터 잘츠부르크의 스티글(Stiegl)과 크렘스의 예거(Egger) 같이 현지에서 마실 수 있는 지역맥주까지 다양한 맛을 섭렵했다.
비엔나 맥주의 상징 오타크링거와 괴서. 오타크링거 헬레스와 괴서 라들러를 추천한다.
벨기에의 레페와 마찬가지로, 오타크링거와 괴서도 여러 종류가 있다. 개인적으로 오타크링거는 맑고 순수한 헬레스 스타일이 좋랐고 괴서는과일향 가득한 라들러가 마음에 들었다. 크렘스를 여행하가가 유람선 선착장 바로 앞의 멋들어진 카페에서 휴식을 취한 적이 있었다. 이름다운 도나우 강을 바라보며 마신 예거 맥주의 경쾌하고 청아한 맛은 아직도 입가를 맴돌고 있다.
비엔나 시내 슈타트파크 근처에 살름 브로이(Salm Bräu)라는 크래프트 맥주집이 있다. 내가 한 달에 적어도 2번 이상은 방문하는 단골집이다. 나는 이곳에서 수제 맥주 특유의 깊고 쌉싸름한 맛을 즐기곤 하는데, 특히 좋아하는 생맥주는 진한 몰트 향의 보헤미안 믹스다. 뜻 맞는 지인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보헤미안 믹스와 로스트 포크를 먹노라면 그 이상 행복할 수가 없다.
비엔나의 대표적인 크래프트 맥주집 살름 브로이에서 나는 보헤미안 믹스 생맥주를 즐겨 마신다
유럽과 한국 맥주의 3가지 차이
앞서 언급했듯이, 유럽의 맥주는 4차원의 입체감을 지닌 반면 한국의 맥주는 2차원적 평범함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는 원재료의 품질, 블렌딩의 다양성, 사회적 포지셔닝 이 세 가지에서 이유를 찾는다.
먼저 원재료의 품질. 맥주를 구성하는 핵심 재료는 물과 보리, 홉, 효모다. 그리고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보리와 홉이다. 보리(정확하게 말하자면, 벼과의 대맥)의 싹을 말린 맥아(영어로는 몰트)는 맥주의 맛과 색을 결정한다. 작년에 한국에서 출시된 테라 맥주가 호주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의 청정 맥아를 100% 사용하여 만들었다고 굳이 광고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홉은 맥주 특유의 쌉싸름한 맛을 내게 하는 첨가물이다. 잡균 번식을 방지하고 저장성을 높여주는 역할도 담당한다. 어느 지역에서 재배된 홉을 사용하느냐, 몇 가지 종류의 홉을 혼합하느냐가 맥주의 맛을 좌우한다. 예컨대 벨기에 맥주의 황태자 듀벨은 슬로베니아의 스티리언 골딩 홉과 체코의 사츠 홉을 함께 첨가하고, 매년 새로운 제3의 홉을 추가한 듀벨 트리펠 홉 리미티드 에디션을 출시하여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맥주의 핵심 원재료인 맥아(좌)와 홉(우)
한국에서 먹는 쌀밥이 유난히 찰지게 맛있고, 벨기에에서 먹는 와플이 별나게 혀에서 녹아내리는 이유는 결국 원재료의 차이 때문이다. 유럽의 명품 맥주들은 뛰어난 품질의 보리와 홉을 사용한다. 프랑스와 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이 보유한 가장 경쟁력 있는 산업은 소위 1차 산업으로 분류되는 농업, 임업, 축산업이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첨단 관리시스템을 통해 재배된 보리와 홉이야말로 유럽 맥주의 품격을 높이는 원천이다.
다음으로 블렌딩의 다양성. 기존의 재료 혼합 방식이나 제조공정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새로운 시도와 창의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도전정신이 있는가 그리고 해당 국가의 규제법과 독과점 시장이 이러한 도전을 허용하느냐의 문제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산 흑맥주의 전설 기네스의 탄생은 홉의 비중을 줄이고 다크한 맥아액을 첨가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캔 안에 이산화탄소와 질소 혼합물을 담은 위젯이라는 둥근 공을 넣었다. 기네스 맥주 특유의 진한 크림거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의 황금빛 맥주를 가능케 한 필스너 우르켈은 체코에서 재배되는 모라비아 맥아, 사츠 지역의 홉, 뮌헨의 효모가 혼합되어 맥주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갔다. 화려한 색상과 청량한 식감으로 애주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필스너 우르켈은 지금도 세계 맥주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맥주시장은 두산오비와 하이트진로의 과점체제가 공고히 유지된 가운데 맥주 원가보다 높은 세율(주세+부가세)을 책정하여 세수 증대에만 관심이 있는 정부와, 페일 라거 계열의 깨끗한 식감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다양한 미각을 자극하는 맥주의 풍미를 사실상 포기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인 포지셔닝. 유럽에서 맥주는 와인과 함께 애주가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알코올 음료수다. 웬만한 식당에서 생맥주를 주문하려면 대여섯 개의 메뉴 중에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맛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옥토버페스트 같은 글로벌 맥주 축제도 가능하다.
반면 한국에서 맥주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다. 소득 수준에 따라 소주와 위스키가 더 선호되는 경우가 많다. 취향에 따라 막걸리, 사케, 와인을 즐겨 마시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맥이나 폭탄주 제조를 위한 보조 블렌딩 신세로 전락하기도 한다.
맥주 애호가인 나는 한국에서 자체 제조된 맥주가 단순한 청량감 해소 차원을 뛰어넘어 풍부한 식감을 자랑하는 맥주로 진화하기를 기대한다. 강하고 진한 맛의 맥주, 홉의 톡 쏘는 질감이 강렬한 맥주, 청량한 탄산수 같은 라거, 과일향 듬뿍 배인 에일 등 다양한 품종의 국산 맥주가 진열되어 고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최근 뉴스를 보니 이제야 정부가 주류 규제 개선방안을 마련한다고 한다. 만시지탄이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언젠가 유럽 맥주들과 실력을 겨룰만한 국산 명품 맥주가 제조되어 세계인들에게 마시는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 그날을 상상하며, 나는 오늘도 비엔나 살람 브로이에서 보헤미안 믹스 생맥주를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