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에 겨울이 찾아왔다. 오스트리아는 11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 차가운 겨울 날씨가 이어지지만, 영하를 밑도는 날이 많지 않아서한국처럼 매서운 강추위는 아니다. 하지만 워낙 바람이 강하게 불고 안개비가 종종 내리기 때문에 체감온도는 그보다 훨씬 낮게 느껴진다. 오후 4시만 되면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 유럽 특유의 바깥 풍경도 겨울의 스산함을 더해준다.
봄에 새싹이 돋고 여름에 뜨거운 햇살이 작렬하며 가을에 낙엽이 지듯이, 겨울에는 하늘에서 소복이 눈송이가 내리는 게 자연의 섭리다. 올 겨울에는 서울보다 비엔나에 첫눈이 먼저 내렸다. 지난 12월 3일, 아침에 일어나 밖을 쳐다본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나,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고 하늘에서는 여전히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테라스 문을 열고 자두와 함께 마당으로 나갔다. 난생처음 눈을 밟은 자두는 처음에는 조금 당황해하더니 이내 신나게 뛰어놀기 시작했다. 나와 주니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꾹꾹 눌러 작은 공을 만들고 자두와 공놀이를 했다. 자두는 눈으로 만든 공을 코와 발로 가지고 놀면서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어놀았다. 얼굴에 눈을 잔뜩 묻힌 자두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비엔나에 첫눈이 내린 날, 아침에 일어나 바깥을 바라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자두는 하루 종일 눈밭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대부분의 유러피언들은 크리스마스가 포함된 12월 마지막 2주를 가장 소중하고 각별하게 생각한다. 주위의 가족과 친구, 지인들과 어울려 크고 작은 모임을 갖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을 주고받는다. 성탄절을 전후해서는 가족과 스키여행을 떠나거나 유명 휴양지를 찾아가 맛난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곤 한다.
11월 말부터 2차 락다운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이 모든 봉쇄조치가 크리스마스를 예년처럼 활기차게보내기 위한 예비조치라고 위로했다. 설마 코로나 때문에 유럽의 최대 축제인 성탄절 연휴를 외부로부터 차단된 채 우울하게 보내게 되리라고는 그 어느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를 비롯해 주요 유럽 국가들은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놀게 되면 코로나 확산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12월 초에 인구 5,200만 명인 한국의 하루 확진자 수가 600명 정도였을 때, 전체 인구가 880만 명에 불과한 오스트리아의 1일 확진자 수는 1만 명을 웃돌았다. 아이가 다니는 국제학교에서는 연일 새롭게 발생한 코로나 확진 현황을 이메일로 알려주었다.
락다운이 해제된다는 전제 하에, 설레는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여행을 준비하던 많은 유럽인들은 그야말로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의 국경 봉쇄 수준으로 제한 조치가 강화되면서 인근 국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티롤 지역의 알프스 산맥 스키장과 스파 휴양지를 일찌감치 예약했건만, 호텔과 식당의 영업 중지를 확인한 후 서둘러 취소해야 했다.
동화같이 아름다운 오스트리아 티롤 지역에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려던 우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냥 가만히 집에서 보내는 것만이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그렇지만 한 달여 이어진 락다운으로 집에서 하루 세 끼를 해결하는 생활도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 풍경 좋은 휴양지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려는 계획이 무산되면서 찾아온 허탈감도 만만치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무리해서라도 제대로 힐링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가족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졌다.
유럽에서 락다운을 하지 않은 따뜻한 겨울 휴양지는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와 몰타 두 곳뿐이었다. 먼저 카나리아 제도는 아프리카 서북쪽 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7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럽의 하와이라 불리는 이곳은 겨울에도 영상 10도 밑으로 내려가는 일이 없어서 특히 추운 계절에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다.
프리미어리그 멘체스터 시티의 레전드 다비드 실바 고향이자 <왕좌의 게임> 시즌7과 tvN <윤식당2> 촬영지로 유명한 카나리아에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섬은 테네리페와 그린 카나리아다. 우리는 열심히 인터넷 자료를 검색하며 카나리아를 대표하는 두 섬 중 어디로 갈지 행복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비엔나에서 출발하는 직항노선이 없는 데다가 강아지를 데리고 장거리 비행을 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윤식당2>의 촬영지이기도 한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 섬
이탈리아 반도 아래에 있는 지중해 섬나라 몰타도 겨울 휴양지로 손꼽히는 장소다. 한국에서는 2018년 방탄소년단의 몰타 여행기와 2019년 <걸어서 세계 속으로> 몰타 편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총 6개의 섬으로 구성된 몰타 공화국의 전체 면적은 제주도의 6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여행객들이 주로 방문하는 곳은 수도 발레타가 위치한 남부의 몰타섬이다.
명성이나 볼거리만 놓고 보면 카나리아가 몰타보다 훌륭했다. 하지만 강아지를 데리고 가는 여행이라 직항여부와 항공시간을 꼼꼼히 따져봐야 했다. 비엔나에서 몰타는 편도 직항 편이 존재했고(갈 때는 뮌헨 경유), 비행시간은 2시간밖에 안 걸렸다. 자두를 생각한다면카나리아보다 몰타로 크리스마스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덜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몰타가 우리 마음에 든 이유는 말티즈의 고향이라는 역사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말타로 발음하는 몰타(Malta)에서 태어난 스피츠 종의 개가 바로 말티즈(Maltese)다. 19세기 영국은 몰타를 식민 지배하면서 이곳 태생의 개를 빅토리아 여왕에게 헌상하고 말티즈라 명명했다. 이후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애견인들에게 말티즈는 가장 사랑받는 견종 중 하나가 되었다.
지중해의 보물로 불리는 몰타의 바닷가 풍경
과연 코로나 위기 상황인 현시점에서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안전한 행동인지 끝까지 고민했다. 하지만 모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유럽에서 가족과 함께 지낸 2020년을 그냥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2주 앞두고 마침내 항공과 호텔 예약을 했다. 이제 잘 준비해서 무사히 출발하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