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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Oct 05. 2021

청정 호수와 트래킹, 그문덴의 아름다운 추억

1년 만에 자두와 함께 다시 찾은 잘츠카머구트의 숨은 보석, 그문덴

우리 집 귀염둥이 말티즈 자두와의 역사적인(?) 첫 나들이는 잘츠부르크 인근 장크트볼프강과 할슈타트였다. 2020년 여름 가족여행으로 머문 그곳에서 자두는 어딜 가나 '인싸' 대접을 받았다. 생후 3개월의 귀여운 자태를 뽐내며 아장아장 뛰노는 자두의 모습에 지역 주민들은 탄성을 질렀다. 증기를 내뿜는 샤프베르크 산악열차에서도, 할슈타트의 호수 유람선에서도 자두는 관광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알프스 산맥의 지류를 따라 76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반짝이고 있는 이곳을 사람들은 잘츠카머구트라고 부른다. 카머구트(kammergut)는 황실의 소유지라는 뜻이다. 과거 합스부르크 제국의 왕족들은 풍광이 아름답고 맑은 호수와 온천이 있는 이 지역을 즐겨 방문했다. 황제 가족들이 별장을 짓고 휴가를 즐기던 잘츠카머구트가 이제 전 세계 시민들이 사랑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2021년 9월의 마지막 주말, 우리는 자두와 함께 다시 그곳을 방문했다. 이번에 우리가 선택한 도시는 그문덴(Gmunden)이다. 비엔나에서 차로 2시간 30분 정도 운전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잘츠카머구트 지역이기도 하다. 이제는 한결 성숙해진 자두를 뒷자리 캔넬에 넣고, 우리 가족은 그문덴으로 출발했다. 출발하기 전날까지 일주일 이상 흐리고 비가 내리던 잘츠카머구트는 화창한 햇살과 뭉게구름으로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보통 3시간 정도 이동하는 여행길에서는 중간지점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나와 아내가 교대로 운전을 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쉬는 동안, 자두도 기지개를 펴고 산책하며 시원하게 배변을 해결했다. 그런데 차로 돌아온 자두의 얼굴과 다리에 도꼬마리 열매가 가시처럼 깊숙이 박혀 있었다. 특히 자두처럼 털 많은 개들은 가을에 풀밭 산책을 하다가 종종 이런 일을 겪게 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두도 산책을 하며 배변을 했다


이런 경우, 한번 붙으면 도통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도꼬마리를 무작정 힘으로 뜯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털까지 뽑힌 개가 아파서 온몸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가르마를 하듯 최대한 털을 벌리고 난 후, 박혀있는 가시만 조심스럽게 제거해야 한다. 우리 집에서 여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은 아내다. "애고 많이 아프겠네. 조금만 참자" 아내는 자두를 살살 달래가면서 도꼬마리를 깨끗하게 제거했다. 자두는 고마운 듯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며 안겼다.


도꼬마리 소동을 뒤고 하고 우리는 마침내 그문덴에 도착했다. 알프스 산맥의 청정 빙하수로 만들어진 트라운 호수는 감탄이 절로 날 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백 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호숫가 전망 좋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우리는 바로 앞에 펼쳐진 호수로 걸어갔다. 차 트렁크에서 가져온 간이의자를 펼치고 앉아서 시리도록 찬 호수 물에 발을 담갔다.


멀리 태양이 붉게 지고 있는 트라운제의 청량한 물가에 고니 두 마리가  다가왔다


그문덴의 상징인 트라운제와 호수를 에워싼 알프스 산맥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잠깐 졸다가 깨어나니 바로 앞에 고니가 다가와 있었다. 자두가 놀라서 소리 내어 짖기 시작했다. 자두는 고니의 모습과 "쇅"하는 소리에 유독 경계심을 들어냈다. 아쉽지만 자두를 달래기 위해서는 자리를 이동해야 했다.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호수와 이를 둘러싼 바위산,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건물과 사람들. 서서히 노을이 지는 트라운 호수와 함께 그문덴의 첫날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트라운슈타인산에 올랐다. 이 산의 정상에는 라우다흐라고 불리는 보석 같은 호수가 있다. 호수까지 가는 1시간 트래킹 코스는 적당한 경사가 있는 천혜의 산책길이었다. 오가며 마주하는 낯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자두는 씩씩하게 앞장서서 걷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고 우리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트래킹 하면서 내려다본 그문덴의 전경과 산 정상에서 바라본 라우다흐 호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과연 내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을 어떻게 표현해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막막함을 느꼈다. 그저 말없이 있는 그대로 느끼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 조화를 이루면서 지혜롭게 관리된 자연은 우리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안겨준다. 그문덴은 나에게 자연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마음껏 펼쳐 보였다.


트라운슈타인산 정상 트래킹 길에서 그문덴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아빠와 자두


1시간 트래킹 끝에 도착한 라우다흐 호수에서 주니와 함께 물놀이하고 있는 자두


트라운슈타트산을 내려와 오르트성을 산책하며 그문덴 여정을 마무리했다. 오스트리아의 연인들이 최고의 결혼식 장소로 꿈꾸는 오르트성은 120미터의 나무다리를 지나 호수 위에 자리 잡은, 한 폭의 그림 같은 교회다. "우리 나중에 금혼식을 여기에서 할까?" 나의 쑥스러운 제안에 아내는 빙긋이 웃었다. 저 앞에서 주니와 자두가 오손도손 걸어가고 있었다.




인구 1만 3천여 명 정도의 지방 소도시인 그문덴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마을", "호숫가 도자기 굽는 도시" 등으로 알려져 있다. 여행하기에 앞서 인터넷으로 검색한 그문덴은, 트라운 호수를 둘러싼 아름다운 마을과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오르트성,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그문덴 도자기로 요약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머문 1박 2일 동안 그문덴은 마치 마법을 부린 것처럼 환상적이고 놀라운 매력을 나에게 선사했다.  


1965년 개봉된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기도 한 잘츠카머구트 지역은 어디를 가나 깎아지른 듯한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뿐만 아니라 우리가 머문 그문덴 호텔도 탁 트인 잔디밭과 아름드리나무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자두와 밤 산책을 하다가 하늘을 쳐다보니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그문덴 호텔에서 아침 산책을 하고 있는 아빠와 주니 그리고 자두


유럽에 살면서 깨달은 점 중에 하나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를 겪는 사람이 가족과 함께 자연스럽게 외부 활동을 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유난을 떨며 배려하지 않는다. 한여름 도나우강 수영장에서도, 동네 스포츠클럽에서도 중증 장애인들이 전동 휠체어를 타고 스스로 움직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문덴 트래킹 길에서 지적 장애 아들과 함께 걸어가는 엄마를 만났다. 자두가 다가가니 아이가 만져도 되냐고 엄마와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얌전히 자신 앞에 선 자두를 손으로 만지면서 아이는 행복하게 교감했다. 조금은 어색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아이에게 친근함을 표현하는 자두가 의젓하고 대견스러웠다. 헤어지면서 아이 엄마는 정말 고맙다고 거듭 인사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는 왕복 2시간의 트래킹에서 치명적인(?) 엉덩이 매력을 발산하며 씰룩씰룩 걸어가는 자두를 바라보니 갑자기 옛 생각이 떠올랐다. 생후 2개월이 조금 지나서 우리 집에 입양된 자두는 처음에 동네 산책을 힘들어했다. 주저앉아서 꼼짝하지 않는 자두를 들게 달래서 끌고 다닌 적이 많았다. 길가나 잔디밭에 떨어진 해로운 것을 먹어서 주둥이를 열고 겨우 빼낸 적도 있었다.


이제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한 자두는 몰라보게 믿음직스러워졌다. 공원 산책을 하며 잔디에 코를 박고 있으면, 충분히 냄새를 맡도록 기다려 줄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메일로 정보를 주고받듯이, 개들은 피(pee, 오줌) 메일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다른 개들이 싼 오줌 냄새를 정성스럽게 맡고 나서, 그 위에 자신의 오줌을 싸는 자두의 모습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눈과 귀를 행복하게 하는 자연 경관, 입을 즐겁게 하는 맛난 음식, 코와 다리를 상쾌하게 하는 숲 속 트래킹. 그문덴은 진정한 힐링 휴양지의 3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 '행복 마을'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식사할 때와 경치를 바라볼 때에는 옆에서 얌전히 지켜주고, 트래킹할 때에는 앞장서서 씩씩하게 걷는 자두가 있어서 더욱 즐거웠다.


1년 만에 다시 찾은 잘츠카머구트 그문덴에서 자두와 함께 경험한 장면들은 우리 추억의 노트에 소중히 간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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