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우파크와 되블링 숲에서 자두와 산책하며 추억 쌓기
제주도가 바람, 돌, 여자가 많은 삼다의 섬이라면, 비엔나는 삼다의 도시다. 먼저 제주와 마찬가지로 바람이 많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불어서 깜짝 놀랄 때가 많지만, 덕분에 공기는 맑고 쾌청하다. 또한 숲과 공원이 많다. 비엔나 어디에 살든 걸어서 10분 거리에 정성스레 가꾸어진 공원이 있다. 근교로 나가면 거대한 숲이 도시의 청량한 허파 역할을 담당한다.
마지막으로 비엔나에는 개가 많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각양각색의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시민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곳 사람들의 개에 대한 사랑과 배려는 상상을 초월한다. 아침마다 자두와 산책하는 도나우파크에서 나는 눈이 먼 개를 산책시키는 어떤 아저씨와 매일 만난다. 맹인 안내견이 아니라 맹견 안내인인 셈이다. 앞이 안 보여도 공원의 풀내음과 바깥공기를 쐬어 주려는 보호자의 따스한 마음이 그저 경외스러울 따름이다.
굳이 멀리 여행하지 않아도 비엔나에 살면서 동네 공원과 교외지역의 숲을 산책하다 보면 일상의 피로를 풀고 자연 속에서 힐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나의 여정에는 우리 집 귀염둥이 자두가 항상 함께 했다. 자두와 함께 비엔나의 아름다운 도시공원과 거대한 숲을 거닐다 보니 어느새 바뀐 계절이 주위의 풍경을 변화시키는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비엔나 카그란에 있는 우리 집 주위에는 넓은 잔디밭과 갈대 우거진 산책길이 있다. 차를 타고 멀리 떠나기에 앞서, 주니와 나는 동네 잔디밭에서 자두를 산책시키며 사전 트레이닝을 실시했다. 아쉽게도 우리 집을 둘러싼 잔디밭은 훈데베어보트(Hundeverbot), 즉 개가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지정되어 있다. 근처에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있어서 어린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 일찍 아니면 어스름한 저녁 무렵에 자두와 함께 동네를 산책했다. 대형견들에 비하면 자두가 작고 귀엽기 때문에 아이들이 다가와서 만지고 싶어 했다. 그래도 아이 부모 중 누군가는 싫어할 수 있고 심한 경우 신고하면 벌금을 내야 한다. 주니와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산책을 했고, 배변을 하면 깨끗이 치웠다.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 나가면 개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터가 나온다. 우리가 갈대숲이라고 이름 붙인 이곳에서 자두는 신나게 걷고 달리며 강아지 시절을 보냈다. 오고 가는 길에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이웃 주민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자두는 언제나 그렇듯이 꼬리를 흔들며 낯선 개에게 살갑게 다가가서 인사를 나누었다. 보호자들은 개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수컷인지 암컷인지, 몇 살인지, 무슨 종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집 근처 도나우파크에서 자두와 1시간 정도 산책을 한다. 정성스러운 공원 관리 덕분에 잔디 상태가 월드컵 축구경기를 해도 좋을 만큼 훌륭하다. 거대한 나무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며 서 있고, 갈대와 연꽃으로 치장한 호수에는 고니와 청둥오리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다. 공원 구석구석 세워진 동상에서 체 게바라와 시몬 볼리바르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뜻밖의 즐거움이다.
한여름에 땀 흘리며 걷던 도나우파크에 어느새 선선한 가을바람이 찾아왔다. 자두와 산책하며 길을 바라보니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호숫가 근처에서 바람을 쐬던 고니들이 공원 순환열차 철길을 사이에 두고 자두와 마주쳤다. 고니가 경계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쇅~ 소리를 내자, 겁 많은 자두는 부리나케 도망가기에 바빴다.
자두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강아지의 흥미로운 본능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자두의 감출 수 없는 기쁨은 귀와 꼬리에서 나타난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자두의 양쪽 귀가 머리 뒤에서 맞닿을 정도로 일자가 되면, 지금 자두가 최고로 기분이 좋다는 뜻이다. 꼬리를 흔드는 속도는 자두의 설렘과 비례한다.
깨끗하게 정돈된 공원 잔디밭에서 산책을 할 때, 자두가 온몸을 잔디에 비비며 뒹구는 경우가 가끔 있다. 풀내음과 흙냄새가 너무 좋아서 자신의 몸에 그대로 간직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개는 후각이 발달되었고 냄새에 예민하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반려견을 잘 씻기지 않는다. 대신 털이 많은 개들은 빗질을 수시로 해서 외모 관리를 한다.
집 근처 공원 산책을 통해 어느 정도 단련된 자두와 함께, 이제 우리는 비엔나 인근의 울창한 숲으로 여행을 떠났다. 비엔나 서북부의 되블링 지역에는 비엔나 숲(Vienna Woods)이라 불리는 거대한 숲과 잔디언덕이 있다. 우리는 한 달에 한번 정도 그곳으로 가서 산책을 하고 식사를 하며 자연의 풍요로움을 만끽했다.
비엔나 숲에는 다양한 트래킹 코스가 있다. 근처 도로에 차를 대고 천천히 산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산악자전거를 타고 모험을 즐기는 라이드족도 제법 많이 볼 수 있다. 숲 속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자두와 자유롭게 걸으며 언덕에 오르면 비엔나 도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 비엔나에 오기 전까지는 이 도시가 전 세계에서 삶의 질이 가장 좋은 곳으로 매년 선정된 이유를 잘 몰랐다. 그저 음악과 예술의 도시이자 아름다운 관광명소가 있는 지역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1년 가까이 거주하면서 실제로 체험하다 보니, 왜 비엔나가 그토록 살기 좋은 도시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물론 삶의 편리성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기준으로 둔다면 비엔나보다 서울이 훨씬 뛰어날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여유로움을 즐기고 자연 속에서 힐링하는 인생을 원한다면 비엔나만큼 좋은 곳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곳에는 사람 못지않게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개들이 있다.
나는 강아지와 비엔나의 숲길을 거닐고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 '자두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 시간은 '나를 위해' 더욱 소중한 순간이었다. 자두와 함께 비엔나의 숲과 공원을 산책하며, 나는 혼자 걸을 때 경험할 수 없는 값진 추억들을 새록새록 쌓아갔다.
계절이 자연의 풍경을 마법으로 바꾸는 비엔나 숲 속 오솔길에서 오늘도 나는 자두와 함께 새로운 여행을 떠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