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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Oct 11. 2021

부다페스트와 시오포크, 가을을 거닐다

화려한 도시와 거대한 호수를 여행한 2021년 9월의 추억

2021년 2월 나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아내와 주니 그리고 자두와의 소중한 추억을 뒤로한 채,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9월 추석 연휴에 나는 다시 비엔나를 찾았다. 지난해 7월 자두를 극적으로 입양하고 같이 지낸 시간이 7개월이었으니, 함께 보낸 기간과 헤어져 있던 기간이 공교롭게도 같았다. 과연 자두는 아빠를 기억하고 있을까?


거의 하루가 걸릴 만큼 지루했던 경유 비행 끝에 마침내 비엔나에 도착했다. 공항 입국장으로 들어서니 아내와 주니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아니 그보다 앞서 내 품에 안긴 건 바로 자두였다. 세상에나, 아빠를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코를 들이대면서 연신 혀로 내 얼굴을 핥는 자두를 꼭 껴안았다. "그동안 잘 지내줘서 고마워 자두야. 아빠랑 즐거운 추억 많이 쌓자꾸나"


7개월의 이별에도 불구하고, 자두는 아빠를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었다


여행 일정 잡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아내는 올가을 가족여행지로 헝가리를 선택했다. 10여 년 전 출장으로 다녀온 적이 있는 아내를 제외하고는 가족 모두 처음 가보는 곳이라 설렘이 컸다. 과연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시오포크의 벌러톤 호수는 얼마나 웅장할지, 큰 기대를 안고 우리는 출발했다. 차 뒷자리 전용 캔넬에 편안히 자리 잡은 자두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는 차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차를 운전하며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샌가 국경을 넘곤 한다. "다른 국가로 넘어갔구나!"하고 느끼게 되는 건, 도로의 질과 속도제한 변경을 통해서다. 헝가리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반영하듯이, 부다페스트로 가는 1번 간선도로는 편도 2차선의 좁은 길이었고, 자동차보다 대형 화물차가 훨씬 많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헝가리 민심을 달래기 위해 유럽 대륙 최초로 1896년 개통된 지하철이 지금도 부다페스트 시내를 관통하고 있다. 이후 소련의 지지를 받는 공산정부가 들어서고 이에 저항하는 헝가리 혁명이 발발하여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헝가리는 대표공항 이름을 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공항으로 지었다. 19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프란츠 리스트를 기리기 위해서다.


서울이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북과 강남으로 구분된다면, 부다페스트는 다뉴브강을 가운데 두고 서쪽의 '부다'와 동쪽의 '페스트'로 나뉜다. 예전에는 부다에 귀족 등 지배층이 주로 살았고, 페스트에 서민들이 거주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페스트 지역이 더 번화하고 활기차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굴곡을 겪은 나라의 수도답게 과거 전성기 시절의 빛나는 성취와 20세기 좌절과 실패의 어두운 그림자가 묘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파리, 프라하와 함께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부다페스트 거리를 우리는 천천히 거닐었다. 오후에 갑자기 흐리고 비가 내리더니 이내 활짝 개이기 시작했다. 국회의사당 좌측의 헝가리를 대표하는 정치인 언드라시 줄러 기마상 위로 떠오른 무지개를 바라보며 나는 탄성을 질렀다. 헝가리 국회의사당은 건국 1000년을 맞이하여 1902년에 완공한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규모로는 영국 웨스트민스터에 이어 세계 2위다.


헝가리 수상(1867~1871)을 역임한 언드라시 줄러 백작의 기마상 위로 일곱 색깔 무지개가 떴다


우리는 자두와 함께 부다페스트의 상징인 국회의사당 야경을 감상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부다페스트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어부의 요새로 향했다. 어부들이 시민군을 결성하고 왕궁을 지키기 위해 만든 요새인데, 지금은 부다페스트를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언덕 위 넓은 광장으로 올라가니,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마차시 성당과 헝가리 초대 국왕이자 수호성인인 이슈트반 1세의 동상이 우리를 맞이했다.


자두는 길을 걷다가 만난 개들과 연신 냄새로 서로를 확인했다. 처음에는 낯선 환경에 다소 당황한 듯이 보였지만, 이내 씩씩하게 오르막길을 앞장서서 걸어갔다. 하지만 잘 정돈된 잔디에는 여지없이 개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있어서 실망스러웠다. 지하철에서는 가파른 경사에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 때문에 항상 자두를 꼭 안고 타야 했다.


물론 유럽 국가들의 반려견 사랑 문화에 헝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가 묵은 호텔 인근에는 어질리티 시설을 갖춘 펫 파크가 있었고, 거리 어귀마다 반려견 전용 배변봉투가 비치되어 있었다. 토요일 오전 어부의 요새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볐는데, 모두들 자두를 보고 "So cute!"를 연발했다. 주로 대형견을 키우는 유러피언들에게는 귀엽고 조그마한 데다가 붙임성 만점인 자두가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어부의 요새 기둥 사이에 얌전히 앉아 있는 자두 너머로 국회의사당과 도시 전경이 내려다 보인다


오후에는 페스트 지역에 있는 바치 거리를 산책했다. 세련된 상점과 멋진 카페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우리는 헝가리 전통음식인 굴라쉬와 파스타, 스테이크를 먹었다. 인터넷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식당답게 정말 굴라쉬가 맛있었다. 어디든 원조 맛집은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1858년에 세워진 유서 깊고 유명한 카페 제르보에서 달달한 도보스 토르테를 커피와 함께 음미하며 부다페스트와의 짧지만 강렬했던 만남을 마무리했다.




구글 지도를 보면 부다페스트 남서쪽에 세로로 길게 위치한 광활한 호수를 발견할 수 있다. 내륙국가인 헝가리 국민들이 '헝가리의 바다'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벌러톤 호수(Lake Balaton)다. 서울의 면적이 605.2㎢인데, 벌러톤 호수 면적이 592㎢이니, 거의 서울만 한 크기의 호수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2만 5천여 년 전 엄청난 지형변화로 인해 생겼다고 한다.   


우리는 벌러톤 호수 인근 도시 중 시오포크라는 곳을 여행했다. 부다페스트에서 차로 1시간 30분가량 떨어진 곳인데, 여기만 해도 물가가 꽤 싼 편이었다. 덕분에 아내가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는 거의 대저택에 가까웠다. 정원 잔디밭에서 자두는 신나게 뛰어놀았고, 우리는 야외 자쿠지에 몸을 담그고 밤하늘 별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 멀리 시오포크 로고가 보이는 벌러톤 호수 앞 잔디밭에서 산책하고 있는 자두와 주니


벌러톤 호수 유람선에서 주위 경관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자두


숙소에서 여유롭고 호사스러운 밤을 보낸 우리는 다음날 벌러톤 호수 전경이 보이는, 가장 전망 좋은 곳으로 향했다. 호수 앞에는 호텔 등 각종 숙박시설과 식당, 드넓은 잔디와 놀이기구가 다채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자두는 신선한 호수 내음을 맡으면서 풀밭을 뛰어다녔다. 아무래도 관광지이고 가족단위의 시민들이 많기 때문에 줄을 풀고 마음껏 달리게 하지 못해서 조금 아쉬웠다.


여유로운 산책을 마친 후, 우리는 바다 같은 호수를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 1시간 코스의 유람선을 탔다.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계절의 변경선에서 하늘은 청명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내 품에 안겨서 호수를 바라보는 자두의 사뭇 진지한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화려한 도시관광과 잔잔한 호수여행을 모두 마친 우리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을 뒤로한 채 다시 비엔나로 출발했다.


명랑한 에너자이저 자두와 함께 한 올가을 부다페스트, 시오포크 여행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잊지 못할 힐링의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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