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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Jan 11. 2024

밤의 서가에서

VOL.12 / 2024. 1월호. 시로 쓴 이야기_3

밤의 서가에서          




 1

     

 어느덧 기현도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4월에는 모교로 교생실습까지 다녀왔음에도 여전히 그는 임용시험이나 취업 공부에 몰두하기는커녕, 문학동아리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대부분 한참 어린 후배들만이 수요일마다 열리는 합평회에 참석하고 있었지만, 4학년 기현만은 홀로 개의치 않고 합평회에 꾸준히 참석했다. 워낙 선후배들끼리 격이 없는 동아리라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후배들이 여전히 시 쓰기에만 몰두하는 기현을 걱정해 줄 정도였다.

 - 선배는 취업 생각은 따로 없으신가 봐요?

 - 아직까지는. 지금은 등단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있어. 임용시험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태로는 공부해도 집중을 못할 것 같고. 집에서는 가끔씩 물어보시긴 하지만.

 기현은 오늘도 다음 주에 있을 합평회에 제출할 작품을 쓰기 위해 도서관 열람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잠깐 자리에서 일어설 때면, 앞뒤 다른 사람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전공서적, 토익교재, 각종 고시 관련 책들이 눈에 띄었다. 다들 저렇게 열심히들 미래를 준비 중인데 나는 여태 성과도 없는 시 쓰기에만 매달려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문학에만 전념하는 것도 일단 졸업 전까지다. 졸업 후엔 다른 길을 함께 모색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 기현이었다.

 11월 중순이었다. 수능 한파인가. 기현은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고 생각했다. 도서관 밖은 쌀쌀한 겨울바람이 불고 있어서 벤치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었다. 신춘문예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기현은 여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다음 주 합평을 위한 시 한 편도 쓰지 못했다. 아무런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시에만 매달리게 되었을까.

 기현은 스무 살부터 사귄 여자친구와 군입대 후 헤어졌다. 복학을 하고 보니 연애하느라 과 활동을 오래도록 하지 않아 과방을 출입하기도 불편했다. 문학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문학동아리에 뒤늦게 들어가게 된 계기도 그 동아리만이 복학생도 신입부원으로 가입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활력이 필요했다. 3학년 때 문학동아리에 들어간 기현은 스무 살 새내기들은 따라올 수 없을 만큼의 열정적인 창작열을 보여주었다. 동아리방에 비치된 시집들과 문예지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또 많은 작품들을 합평회에 써냈다. 때론 호평도 받고 그보다 무수히 혹평도 받았다. 그렇게 이 년 가까운 활동기간 동안 기현은 시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어쩌면 사랑에 실패하고 그 빈자리를 채울 무언가가 필요한지도 몰랐다.

 문학동아리 활동은 기현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변화시킬 정도였다. 이전에는 교직이수 후 하루라도 빨리 중등교사로 임용되어 안정적인 생활을 하리라 계획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남들과는 다른 방향과 속도로 살아가리라 결심하게 됐다. 나는 저들과는 너무 달라져 버렸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현실에 대한 불안감이 가끔씩 엄습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기현은 다시 도서관 서가에 찾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집을 읽고, 또 그들의 시에 영감을 받아 많은 작품들을 모방하려고 애썼다. 임용공부를 하듯 시 공부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래, 졸업 전까지만. 아니, 졸업하고서도 조금은 더 쓸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겨우 스물다섯인데.

 커피가 든 종이컵 속으로 하얀 눈송이 하나가 떨어졌다. 어? 첫눈이네.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기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람을 따라 첫눈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지상과 첫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기현은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이 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가 잠시 생각나기도 했다. 첫눈이라니. 첫눈이 아름답지 않고 쓸쓸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외롭구나. 혼자라는 건. 기현은 남은 커피를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뺨에 닿은 차가운 눈송이들이 그대로 기현의 텅 빈 내면으로 녹아들었다.



 2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 기현은 자주 열람실에서 빠져나와 도서관 서가에 가서 책을 읽었다. 문학 코너. 분류기호 800번대. 눈을 감고도 시집들이 꽂혀있는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빈번히 찾아온 장소였다. 요즘 학생들이 잘 읽지 않는 시집들은 그 추락한 위상을 상징하듯 가장 외진 구석에 비치돼 있었다. 도서대출의 선택을 받지 못한 수많은 시집들. 그들은 늘 그렇듯 대부분 자기 자리에서 도서관의 어두운 그늘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는 시들을 왜 이렇듯 홀로 몰두하고 있는가. 어째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쓰려하는가. 스스로 생각해 봐도 기현은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몇 주 전부터 틈날 때마다 보기 시작한 나희덕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를 읽기 위해 시집 코너를 찾은 기현이었다. 목차대로가 아닌, 펼쳐지는 대로 무작정 읽은 그 시집 중에서 '잔설처럼 쌓여 있는 당신, / 그래도 드문드문 마른 땅 있어 / 나는 이렇게 발 디디고 삽니다 / 폭설이 잦아드는 이 둔덕 어딘가에 / 무사한 게 있을 것 같아 /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면서'로 시작하는 시 '잔설(殘雪)'과,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 그걸 보려고 /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로 끝나는 '땅끝'이란 시가 기현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최소 한두 권의 시집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읽던 기현이었지만, 도서관에서만큼은 이렇게 서가에 있는 다른 시들을 틈틈이 서서 읽곤 했다. 못다 읽은 나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마저 읽으려 오늘도 시집이 꽂혀있던 서가 코너를 서성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기현이 읽다가 꽂아두던 그 시집의 자리가 오늘따라 텅 비어있었다. 누군가 대출해 갔거나, 이 도서관 열람 테이블 어딘가에 앉아 읽고 있는 것이리라.

 기현은 읽으려던 시집을 못 읽게 되었지만 아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기뻤다. 같은 학교 학생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그 시집에 관심을 갖고 읽어준다는 사실이 반갑기만 했다.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길래 자신과 똑같이 그 서정적인 문장들에 끌렸던 것일까. 기현은 괜스레 서가 주변의 열람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시집을 읽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보기도 했다.

 한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시간을 포함하는 일이라고 기현은 요즘 생각했다. 그것은 그 작품을 좋아하고 있는 현재의 시간을 사랑한다는 말과도 같으니까.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작품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관심이 없어지거나 시시해지거나. 작품은 불변하지만 그것에 감동하던 우리들은 변할 수밖에 없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런 의미에서 바로 지금 내가 원하는 문장을 다른 누군가도 원한다는 것은 대단한 타이밍일 수밖에 없었다. 사랑도 그러할까. 과거 여자친구와의 사랑이 이제 누구도 찾지 않는 한 권의 오래된 책처럼 느껴졌다. 캄캄한 서가 어딘가에서 먼지가 쌓이고 있는, 한때의 유행이 지나간 통속소설처럼. 그 책을 함께 읽던 시절은 모두 흘러갔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 어설픈 작품들을 홀로 빌려가 밤새 쓸쓸히 읽곤 던 밤도 마찬가지. 그런 생각을 하던 기현이었다.          



  3     


 수요일 저녁, 동아리방에서는 늘 그렇듯 합평회가 열렸다. 기현은 결국 이번 주의 시 작품을 써내지 못했다. 이런 적은 꽤 오랜만이었다.

 - 오, 기현이 형이 웬일이래. 시 없어요?

 - 아, 영감이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네.

 오늘은 대부분 1학년 후배들의 신작시가 다수를 이뤘으나, 소설을 쓰던 2학년 여자 후배의 단편소설도 제출됐다. 소설에는 크게 관심이 없던 기현이었지만, 그 후배에게 모처럼 시선이 갔던 것은 합평회에 관심이 있어 참관을 왔다는 그 후배의 단짝 친구 때문이었다.

 - 옆의 친구는 누구?

 - 아, 같은 과 친군데요. 1학년 때 알게 됐는데, 시랑 소설에 아주 관심이 많아요. 동아리 활동을 해보고는 싶다는데, 너무 내향형이라. 제가 억지로 좀 데려와 봤어요.

 - 안녕하세요.

 문학에 흥미가 있지만 워낙 내성적이라 동아리 활동을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처음 기현의 시선을 빼앗았던 것은 정확히 말하면 그 후배의 친구가 아니라, 그 친구의 전공 서적 사이에 자리 잡은 얇은 시집 한 권이었다.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창비시선 125. 나뭇잎 무늬인지 나무 무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잔잔한 패턴을 배경으로 한 책등엔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라는 제목과 ‘나희덕 시집’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찍혀있었다. 학교 도서관의 청구기호 표시가 책등 아래쪽에 있는 걸로 봐서, 기현이 근래 서가에서 아껴 읽던 그 시집이 분명했다. 기현은 갑자기 후배의 단짝이라는 그 2학년 여학생이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합평을 하고 있던 후배들의 작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현은 가끔씩 그 여학생을 쳐다봤다. 짧은 단발머리에 자그마한 키, 다소 동그랗고 통통한 하얀 피부의 얼굴. 약간 귀엽게 생긴 타입이랄까. 그러나 이제 막 바라본 겉모습보다는, 학교에 유일하게 한 권 있는 저 시집을 어떤 까닭으로 빌린 것일까, 기현은 그것에 몹시 관심이 갔고 또 묻고 싶었다.

 진지하게 작품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오가는 합평회에서 다른 궁금증이나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작품에 대한 품평이 어서 끝나고 쉬는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기현은 합평회 자체에는 여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다만 저 여학생이 빌려간 한 권의 시집과 그 시간의 문제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아주 특별할 것 없는 한 권의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라는 책을 좋아하거나 혹은 관심을 갖고 있는, 저 애와 자신과의 시간이 지금 겹치고 있다는 것.

 우리가 무언가를 영원히 좋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생각이 바뀌거나 취향이 변하기도 하리라. 젊은 시절에 몰입했던 강렬한 감정들은 먼 훗날 가끔씩 꺼내보는 추억 정도가 되는 게 일반적일 터. 그만큼 한 작품을 가장 좋아하는 인생에서의 시간이 서로 겹치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일까. 같은 방향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 겹친 시간들이 이렇듯 누군가를 만나게도 해주는구나. 결국은 그 만남의 시간들은 잠시 포개지는 찰나의 순간일지도. 앞으로 각자의 시간은 또 다르게 흘러가리라. 우리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항로를 바꾼 채. 끝내 서로를 향해 영영 뒤돌아보지 않으면서.  

 기현은 합평회를 포기하고 동아리방을 나와 홀로 시가 쓰고 싶어졌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기현은 동아리원들을 뒤로하고 도서관에 가서 자신만의 습작노트를 폈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이 그 여학생인지, 함께 관심을 갖게 된 그 시집인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시인지, 기현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다만 떠오르는 시 한 편을 무작정 쓰고 있을 뿐. 지금 이 순간을 쓴다는 것. 변화무쌍한 인생의 시간들 속에서 마치 그것만이 전부라는 듯이.      





밤의 서가에서 *       

  


 몇 년째

 긴 밤의 도서관을 고독은 서성거렸다     


 시 코너 혹은 문학들이 가득 꽂혀있던 서가

 나는 내가 서 있는 쪽 보이지 않는 맞은편에

 누군가 이쪽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이 원하는 책의 제목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어떤 이야기의 시작이었을까     


 소리였을까, 숨결의 향기였나

 아님 깊은 고독의 직감     


 나의 세계와

 맞은편의 세계가 연결되기 위해

 우리는 서가 한가운데에 꽂힌

 가장 아름다운 책의 제목을 빼어 들어야 했지     


 그대와 나의 흰 눈송이들이

 아주 오랜 전생과 후생을 흘러와

 창밖의 지상에서

 마주쳤을 때     


 저 너머의 세계에서

 아무 의미 없는 문학의 이름들이 발밑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에 와 부딪치던 긴 밤

 먼 별의 거침없는 흰 조각,

 조각들처럼




*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중  


허민- 시 쓰는 사람.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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