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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Feb 09. 2024

날개의 기억

VOL.13 / 2024. 2월호. 시로 쓴 이야기_4

날개의 기억          




 까치나 참새처럼 흔한 텃새들 말고, 드물게 눈에 띄는 한 계절의 희귀한 철새들을 볼 때마다 네가 생각나. 수확이 끝난 지 한참 된 초겨울의 휑한 논길을 지나 해안가 갯벌에 닿았을 때, 외따롭게 홀로 서 있는 두루미 한 마리를 발견하듯이, 그렇게.


 종이가 타들어가며 흰 연기를 내뿜을 때 공중 위로 그들의 숨겨진 아픈 날개가 펄럭이는 것 같다고, 네가 다가오며 말했어. 서리가 내려 단단하게 얼어붙은, 텅 빈 논 한가운데서 그날 오전 학생회관에서 받아온 표창장을 내가 씩씩거리며 태우고 있을 때였지.

 “네가 이상한 불을 피우는 바람에 새들이 논가에 내려오질 않잖아.”

 나는 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어. 길고 가는 체구, 갈색의 긴 머리와 커다란 눈. 약간은 다른 피부 색깔을 지닌 너를 열일곱 살 적 내 고향 마을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솔직히 말해서 저 예쁜 애는 누구지? 하는 게 내 첫 느낌이었어.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런 너를 한참 바라보기만 했지.

 “추워서 불을 피우는 건 아니겠고. 뭘 그렇게 논 한가운데서 태우는 거야?”

 “넌 누구야?”

 “산드라.”

 “외국인이야? 근데 왜 이렇게 우리말을 잘하지?”

 “엄마는 한국인이니까. 엄마는 내게 어렸을 때부터 한국어로만 말했어. 그건 그렇고, 뭘 태우냐니까.”

 “상관 마. 그냥 상장이야.”

 “상장을 왜 태워. 집에 잘 보관해야지.”

 “의미 없는 거니까. 상장도 아니지. 불쌍해서 거지한테 주는 동전 같은 거야.”

 “뭔 말이야, 그게?”

 학교 선생님들 중 누군가 추천해서 받은 그 표창장에는 이런 문장들이 쓰여 있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그걸 수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학생회관 행사에서 나는 대표로 받았다. 상장에 쓰인 멘트를 사람들 앞에서 들으면서 나는 분노로 떨렸다. 우리 집 가난하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하는가. 이게 상인가, 벌인가. 당신들이 내가 용기를 잃었는지 잃지 않았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너는 내 얘기를 듣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그날 처음 만난 너에게 왜 굳이 그런 말까지 하게 됐을까. 화가 났기 때문일까, 너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인가. 너는 새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새를 왜 기다려?”

 “탐조인이니까.”

 “탐조인이 뭐야?”

 너는 스페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엄마의 고향인 한국 강화도에서 겨울방학을 보내기 위해 왔다고 했다. 네 꿈은 조류학자. 너는 커다란 렌즈의 카메라와 망원경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겨울 철새가 드나드는 이곳 동검도 갯벌에서 너는 재두루미를 비롯한 스페인에서 잘 보지 못한 희귀한 새들을 관찰하고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상장을 태울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생각해. 네 마음도 이해하지만.”

 너는 새를 바라보게 된 계기를 내게 들려줬다. 더 어릴 적 너도 한국과 스페인을 오가며 자랄 때, 상처 아닌 상처의 말들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했던 너의 엄마는, 마치 새를 기다리듯 네게 다가온 그 말들을 잠시 바라보는 습관을 들여 보라고 했단다. 칭찬의 말이든 비난의 말이든 그 말들 중 네게서 영원한 것은 없다고. 잠시 스쳐가거나, 머물더라도 곧 떠나가는 새의 날개 같은 것이라고. 그걸 굳이 잡아 새장 안에 가둬두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말라고. 더욱 난폭하게 변한 부리와 발톱은 너를 한 번 더 다치게 할 뿐이라고.

 정말 강한 사람들은 부러 무섭게 화내면서 새나 짐승을 쫓지 않고 침착하게 가만히 지켜본다고. 그들이 다가오는 순간을, 혹은 그들이 곧 떠나가는 시간들을. 그처럼 세상에는 영원한 날개란 없는 것인데 애를 태우거나 화를 낼 필요가 있겠느냐고. 그 기다림의 시간이 널 강하게 했다고 했다. 그리고 너는 정말 기다렸다. 사람을, 사람들의 말들을, 그들이 머물다가 떠나가는 붉은 하늘을, 공중의 새들을, 새의 날개와 연기 같은 구름들을.  

 

 우리는 그날 이후 네가 스페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달 동안 많은 새들을 함께 관찰했다. 비록 추운 겨울이었지만 얼굴을 꽁꽁 동여매고, 동검도와 석모도 등지를 자전거를 타고 함께 돌아다녔다. 그리고 천천히 기다렸다. 두루미, 홍방울새, 흰꼬리수리 등 내가 전부 간직할 수 없는 많은 새들과 너와의 추억들을. 기억의 날개들을.     

 그 이후로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한 산드라. 너는 여전히 어디선가 네게 가까이 머물다 사라질 새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네가 내게 해 준 말들을 기억하며, 나도, 천천히 떨어지는 모래시계의 알갱이를 바라보듯, 기다린다. 내게 거친 파도처럼 몰아쳤다 도망치듯 떠나가는 상처의 말들을. 혹은 그늘이 거치며 이마를 따스하게 적시는 봄볕의 날개 같은 사랑의 밀어들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다.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이렇게 천천히 기다릴 뿐인 흰 눈송이들을. 별의 깃털이 되어 떨어지는 작은 문장들을. 그 날개의 흔적을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너를 향해 적어보면서.  




새 관찰         

 


희귀한 새들

저마다 다른

빛깔과

울음의 무늬를 가진    

 

사진으로 남겨두기 위해선

곁으로 날아와

가까운 곳에 잠시

내려와 주길     


기다린다

나뭇가지에 머물고 있는

흔들리는 울음을     


가까워질수록 멀리

달아나는

우리     


저토록 자유롭게

우리는

우리 곁을 떠나간다     


아주 잠시만

머물다가

흔적도 없이

기억도 없이



(미발표시)

<숨 빗소리_ 신작시_ 시로 쓴 이야기> _ 시로 쓴 이야기와 시는 4-5주 주기로 계속 업데이트됩니다.  


허민- 시 쓰는 사람.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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