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6 / 2025. 3월호. 이창호 연재소설_13화
- 이창호
<제13화>
식당은 사람들로 붐볐다. 삼겹살을 시키면 소주가 무료란다. 동걸과 민훈은 의아했다. 방금 전까지 허접하던, 태양이 달라졌기 때문. 심각한 표정으로 태양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 표정이 왜 그러냐? 무슨 귀신 보듯이 사람을 봐."
"아니, 좀 전까지 얼빠져있던 사람이 멀쩡해진 거 같아서…"
"무슨 소리야? 너네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또 뭐요? 설마…"
"설마? 뭐? 아는 거 있어?"
동걸과 민훈은 동시에 말했다.
"시간여행 중?"
"어… 이게 아닌데… 어떻게 알아?"
"알았다고 했잖아요, 과거에서 왔다고 믿을 테니까 이제 그만해요. 사무실 사건 처리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아… 과거가 맞긴 한데, 정확히는 미래에서 온 건데…"
"또 무슨 뚱딴지같은… 과거에서 와서 변호사 된 거도 모른다면서요?"
"그게 과거에서 온 것도 맞긴 맞지. 너희랑 같이 입대했다, 나만 잠에서 깨지 않고 이쪽으로 온 거야."
민훈이 동걸에게 귓속말했다.
"야, 아무래도 무슨 충격인지 받아서 제정신 아닌 거 같다."
"신혼여행이 쇼크였겠지, 그게 맨 정신으로 버티기 힘들 거야."
"야 둘이 뭘 속닥이냐?"
"별 거 아니에요. 일단 술 한 잔 받아요."
태양이 소주잔을 들고 술을 받으려는데, 불쑥 종업원이 뚝배기를 식탁 위에 올렸다. 뚝배기와 부딪친 소주잔이 식탁에 튕겼다.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걸 태양이 제기 차듯 발로 살포시 받아냈다.
종업원을 놀라 태양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태양은 소주잔을 주워 종업원 얼굴을 바라봤다. 그 순간 태양은 미소를 머금었다, 파안대소했다. 웃는 태양을 본 종업원도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민훈이 동걸을 부축하고 태양은 택시를 불렀다. 동걸이는 술에 취했다.
"민훈아, 어떡하냐? 태양이 형 이제 제정신 아닌 거 같은데. 사건은 다 어떡하냐? 그리고 지금 종업원을 기다려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야 좀 조용해, 내일 정신 차리고 회사에서 얘기하자."
"지금 조용하게 생겼냐? 응?"
택시가 도착했다. 태양은 민훈에게 동걸을 부탁한다. 동걸을 태우고 민훈이 따라 탔다. 태양은 뒷좌석 문을 닫으면서 민훈에게 설명했다.
"나도 금방 들어갈 거야, 집까지 데려다줘. 내일 회사에서 보자, 그리고 아까 그 종업원 파리에서 통역해 준 사람이야. 걱정하지 말고!"
"알겠어요, 내일 봐요."
택시가 출발하자, 삼겹살집 간판불이 꺼졌다. 가방을 메고 종업원이 나와 태양을 향해 걸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나도 정말 잊고 있었어요. 내가 아주 멀리, 어디에 좀 다녀왔거든요."
"파리보다 더 멀어요?"
"더 멀죠, 멀기보다 깊다고 해야 하나. 한국에는 어쩐 일이에요?"
"태양 씨 돌아가고 나니, 괜히 쓸쓸하더라고요. 한국인이랑 며칠 지냈더니 그리워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무작정 비행기표 끊었어요."
"무작정? 지금 제가 파리에서 온 지 얼마나 됐어요?"
"기억 안 나요? 2주 전에 파리에서 비행기 탔잖아요."
"아 그래요? 제가 진짜 깊이 어디 다녀오느라고."
"파리에서 만난 그 태양 씨 맞는 거죠? 그 부인과 그 남자랑…"
밴이 ‘그 남자’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자 태양은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르긴 하는데,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밴, 그 남자 이름 뭐였죠? 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누구? 아 그 부인이랑 같이 있던 분…"
밴이 태양의 기억을 일깨웠다.
"맞다, 나와 결혼했던 그 여자… 그리고 그 남자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아 기억이 날 듯 말 듯…"
"그때 태양 씨가 그 사람 이름이 무슨 필이라고 그랬어요."
"네, 최필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나네요."
"아 그런데 그 얼굴을 어디서 본 것 같아요."
"그때는 태양 씨도 아는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전 부인과 관련이 있던…"
"맞아요, 그 사람은 그 여자 전 애인이었어요. 그런데 그것 말고도 뭔가 떠오르는데… 잘 모르겠어요."
태양이 골똘히 생각하자, 밴은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태양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어댔다.
"깊이 생각하면 더 생각이 안 나요, 그나저나 밴은 한국에 무슨 일로?"
"아까 얘기했잖아요, 무작정 왔다고요. 그냥 태양 씨가 한국에 간다고 해서…"
태양은 밴을 바라보며 웃었다. 무슨 의미로 웃는지 모르는 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쁠 때 태양은 크게 웃는다. 웃음을 멈춘 태양은 다시 말을 건다.
"그럼 지금 어디서 자요?"
"여기 사장님이 외국인 알바는 원룸을 빌려줘요. 아까 같이 일하던 베트남여자랑 같이 살아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디예요? 데려다 줄게요."
"10분 정도 걸어야 해요, 그냥 가셔도 돼요."
"어떻게 그냥 가요? 나 때문에 파리에서 왔다면서요."
태양은 밴과 나란히 걸었다. 그녀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양은 매우 피곤했다. 시간여행 탓인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
몇 시간 뒤, 태양은 꿈속에서 귀신을 만났는지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다 이불을 발로 차면서 깨어났다. 태양은 급하게 스마트폰을 찾았다. 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으로 오면서 번호를 바꿨는지, 연결되지 않았다.
‘최필! 어디서 봤는지 생각났다, 내일 저녁 밴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자.’
최필, 태양의 머릿속에 세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결혼식장에서 스친 남자, 파리에서 만난 유괴범, 그리고 대학시절 도망친 강간살인범. 분명했다. 각기 다른 장면이었지만 그 장면 속 남자는 모두 하나의 얼굴로 겹쳐졌다.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한 태양은 동걸과 민훈을 기다렸다. 커피를 내리고 9시 15분에 맞춰 세 잔을 따라 회의 탁자에 올려놨다. 두 친구가 들어왔다.
"형 아침 일찍 나왔네요."
"어, 할 말이 있어. 너네 놀라지 마라…"
민훈과 동걸은 또다시 ‘시간여행 타령이나 하겠지 ‘라고 생각했다. 태양이 말을 꺼내자 커피를 마시던 민훈은 사레에 들렸다. 동걸이 대신 말했다.
"그때 우리가 동암역에서 잠복하면서 찾던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고요? 어떻게요?"
"그건 좀 복잡한데, 확실해. 어제 삼겹살집에서 만난 종업원도 그 남자 얼굴을 알아."
"식당 직원이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우리 대학 때 MT 갔다가 의심했던 남자 알지? 그 남자가 사실 내 신혼여행에 따라왔었고 납치범이었어. 그걸 내가 까먹었다가, 대학시절로 시간여행하고 와서 떠오른 거야."
"확실해요? 미제 사건이라 경찰청 협조받아서 조사해야 하니까, 확신이 있어야 돼요."
"확실해, 어제 식당 직원을 만나서 내가 떠올린 대학시절 범인 얼굴과 파리에서 만난 얼굴이 정확히 일치하는지 확인해 볼게."
점심시간, 찾아간 삼겹살집은 김치찌개를 먹으러 온 손님들로 바빴다. 태양과 친구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밴이 환하게 웃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밴에게 태양은 전화번호를 받았다.
"밴, 오늘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올게요. 저랑 할 일이 조금 있어요."
"알겠어요, 지금 바빠서 이따 봐요."
식당을 마치고 나오는 밴을 태양이 맞았다. 태양은 밴과 근처 커피숍을 찾아 걸었다. 커피숍에서 주문을 마치고 테이블에 앉은 태양은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줬다. 밴은 사진을 자세히 살펴봤다.
"밴, 이 사진은 내 기억대로 컴퓨터로 작업한 얼굴이거든요. 최필이라는 사람이랑 비슷해요?"
"정말 신기해요, 그 얼굴을 어떻게 기억해서 컴퓨터로 그린 거죠? 대단해요."
"이 사진이 파리에서 본 최필과 맞아떨어진다는 거죠?"
"네, 근데 왜 이렇게 흥분했어요?"
"잘 들어요, 놀라지 말고요."
태양은 최필이 대학시절 벌인 연쇄 강간살인 사건을 설명했다. 밴은 공포에 휩싸였다.
‘파리에서 그 남자는 나랑 태양 씨를 죽일 수도 있었구나, 다시 마주치면 어떡하지…’
표정이 어두워진 밴을, 태양이 달랬다. 경찰에 협조 요청해 붙잡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밴은 더 무서워졌다.
"태양 씨가 직접 나서서 잡는 건 아니죠? 태양 씨가 범행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태양 씨를 해칠지도 몰라요."
"그럼요, 위험해요 제가 나서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경찰 도움을 받아야죠."
다음날, 태양은 인천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을 찾아갔다. 동걸이 이 팀에서 근무하는 경찰에게 미리 전화를 해놨다. 전화를 받은 경찰관이 태양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이 변호사님이시죠? 미제사건 수사 요청하러 오셨다면서요? 살인사건이죠?"
"네 맞아요, 제가 정식으로 진정서를 낼까도 생각했지만 혹시 그 과정에서 어디선가 정보가 흘러나갈까 봐요."
"잘하셨습니다. 20년 넘은 사건이라고 들었는데, 살짝 설명해 주실 수 있어요?"
태양은 동암역에서 일어난 연쇄 강간살인사건을 설명했고 당시 스스로 범인을 쫓은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대학 MT 때 본 남자가 의심스러워 그 남자 학교까지 찾아갔지만 휴학하고 사라졌다고.
김 형사는 미제사건 수사보고서를 찾아보겠다고 일어났다. 컴퓨터 앞에 앉은 김 형사는 잠시 뒤 수사보고서를 인쇄했다. 두 부를 인쇄해 태양에게 한 부를 내밀었다.
"미제 보고서에는 ‘십정동 연쇄살인’이라고 제목이 적혀 있네요."
"그러네요. 죽은 사람이 두 명이에요? 죽인 건 한 명이고 강간을 여러 차례 한 걸로 기억하는데요."
"네, 2013년 설을 앞두고 같은 수법으로 강간살인이 있었어요. 동일범이라고 판단하고 수사가 진행됐지만 범인은 못 잡았어요."
"아 제가 군대 있을 때인가 봐요, 저 당시 제가 알아봤을 때도 미리 얼굴을 알아두고 현관을 열어두는 집을 노렸으니까요."
"더 기억나는 게 있으세요?"
"동걸이가 미리 보낸 사진은 받으셨죠? 그 얼굴과 매우 흡사하고요. 뒷목에 물고기 모양 문신이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미제사건수사팀 본격 가동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저희가 더 감사하죠. 목격자인 변호사님이 직접 나서서 사진까지 만들어주셨잖아요."
(다음 호에 계속)
<숨 빗소리_ 이창호 소설>
이창호 - 현직 기자. 저서로 소설 <미필적 고의>, 공동에세이 <그래도 가보겠습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