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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장

VOL.26 / 2025. 3월호. 짧은 이야기_6

by 숨 빗소리 Mar 0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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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장         



 1

     

 역사 밖으로 나와 바라보니 몇 년 전과 꼭 같은 소박한 오타루시의 설경이 눈에 들어왔다. 제설 작업 속 드러난 구 테미야선 기찻길과 키 작은 건물의 기념품 가게들이 운하로 가는 길목을 따라 그대로 펼쳐졌다. 이곳을 너와 처음 걸었었지. 오타루 운하와 스시 골목, 카페 거리와 오르골 본당을 천천히 둘러봤던 기억.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렵게 찾아간 키쿠야 서점까지.

 운하에는 이미 많은 관광객들과 머지않아 다가올 눈빛 거리 축제를 준비하기 위한 사람들로 붐볐다. 운하를 따라 복원된 옛 창고 건물 지붕 아래로는 여전히 긴 고드름들이 매달려 있었고, 눈 조각들과 어우러진 캔들 위엔 꺼지지 않은 작은 불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스시 골목에서 초밥과 어묵탕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낮고 작은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일본풍의 거리. 그 한가운데로 버스 한 대가 느릿느릿 지나갈 때, 몇 년 전 느꼈던 아련한 그리움이 떠올랐다. 감정의 기억. 나는 그때 우리가 곁에 있음에도 우리가 그리웠다. 마치 그때, 지금 홀로 이곳에 찾아올 내 모습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오르골 본당을 지나 계속 바다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선착장과 운송회사들이 즐비한 연안 쪽 길은 관광지와는 다소 떨어져 고요했다. 특별히 볼 것은 없었지만 너는 이곳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했었다. 서점을 찾아가기 전 오타루코 마리나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무수한 배들과 그 너머 출렁이는 겨울 바다를 바라보면서. 저런 요트 하나 타고 세계여행을 해보고 싶다고도 말했었는데. 그랬었는데.          

 키쿠야 북스토어 오타루점은 바다가 창으로 보이는 큰 쇼핑몰 건물 안에 있었다. Kikuya bookstore otaru. 구글맵 지도를 켜고 간신히 찾은 서점. 우리가 함께 오타루에 왔을 때 유서 깊은 오래된 서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인구 십만의 크지 않은 도시이기도 했고, 일본에서도 사람들이 전보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작고 오래된 서점들이 있었더라도 지금껏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 어릴 적 고향의 작은 도시도 그러했으니까. 그렇더라도 다소 문학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원했던 너는 적지 않게 아쉬워했다. 나는 나중을 생각하면 차라리 큰 서점이 더 낫다고 말했다. 책이 많으니까 몇 년 후라도 우리의 책들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렇게 네게 위로해 주었었다.

 서점은 오 년 전 그대로였다. 입구에 붙어 있는 ‘喜久屋書店’이란 한자 간판도 여전했고, 1부터 100이 넘어가는 번호를 코너마다 붙여가며 잡지, 일반도서, 직업별 도서 등으로 분류한 서가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에 의존하여 우리가 서성였던 구석진 자리로 바로 찾아갔다. 서점이 대규모라서 오히려 영역별 자리이동은 하지 않고 예전과 동일한 것 같았다.

 『ノルウェイの林』를 먼저 찾아보았다. 우리나라엔 『상실의 시대』로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일본소설 중 하나라서 그때도 난 대번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너무 유명하고 대중적인 책이라 쉽게 팔릴지 모른다고 너는 걱정했었다. 나는 오히려 이제 많이 알려져 사람들이 덜 찾을 거라고, 그러면서도 서가의 매대에서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책이라고 주장했다. 붉은색과 초록색 표지의 상하권 중 나는 하권을 골랐었다. 다시 찾은 서점에는 하권이 총 2부 있었는데, 그 어느 것을 뒤져보아도 내가 너를 위해 숨겨놓은 문장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사실 네 우스운 제안에 가볍게 장단을 맞췄었기에, 나는 나의 문장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이제는 기억하지 못한다.

  너는 체호프의 『갈매기(かもめ)』를 골랐었다. 하얗고 귀여운 바다 갈매기 한 마리가 표지 한가운데 그려져 있는 문고판. 나중에 쉽게 기억할 수 있으면서도, 왠지 요즘 사람들이 많이 구입하지 않는 문고본이라서 더 애착이 간다고 너는 말했다. 그때 나는 참 너답다, 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작은 갈매기는 여전히 남아 있을까. 서점 건물 밖 가까이에서는 겨울 바다의 차고 흰 날개들이 그대로 넘실거리는데. 너의 문장은 이곳에 둥지를 튼 채 숨죽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훨훨 날아 멀리 떠나가지는 않았는가.      



 2         

 

 “비 오는 날의 네 시 라디오입니다. 오늘 사연은 비 오는 날 놀이공원을 방문한 아이디 Y분의 이야기입니다. 남자친구와 평일 놀이공원을 와봤어요. 연차까지 쓰고 온 날 하필 비가 내렸네요. 운행하지 않는 놀이기구들이 있어서 실컷 다 타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마치 놀이공원 전세 낸 기분 누리다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사연을 보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비 오는 날의 놀이공원은 어떤 기분일까요. 저도 한 번쯤은 경험해보고 싶네요.”

 옥탑방에 누워 함께 라디오를 듣다가 갑자기 네가 일어나 무릎을 탁 쳤다. 저거네. 뭐가. 내가 물었다. 함께 간 장소를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그건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들기, 라고.

 “방금 라디오에서 비가 오는데도 놀이공원에 갔다고 했잖아. 비 오는 하늘 아래서 넓은 놀이공원을 조용히 둘이서만 걷고 뛰어다닌다면, 그거야말로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지 않을까?”

 “그렇다고 일부러 비 오는 날을 골라갈 필요가 있어? 운행하지 않는 놀이기구도 있을 텐데.”

 “나야 어차피 놀이기구 많이 타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 비가 와도 괜찮아. 자기도 긴 줄 싫어하니까 차례 안 기다리고 바로바로 탈 수 있잖아. 아무리 비가 와도 운행하는 놀이기구도 꽤 있겠지. 안 그러면 입장을 시키질 말아야지.”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었다.

 “놀이기구를 타고 안 타고를 떠나서 그런 날의 놀이공원은 왠지 기억에 많이 남을 거 같아.”

 “그렇긴 하겠네.”

 “이런 건 어떨까? 우리 다음 달에 홋카이도 여행가기로 했잖아.”

 “그렇지. 근데 왜?”

 “나는 우리가 혹시 헤어지더라도, 그리고 나중에 자기가 다른 사람이랑 홋카이도 또 여행가더라도 날 잊지 않도록 거길 특별하게 만들어보고 싶어.”

 “아니, 여행가기도 전에 그런 이상한 생각은 왜 하는 거야?”

 “그런 거 해보자.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 러브레터 촬영지가 오타루니까. 거기 가서 오래된 서점 하나를 찾는 거야.”

 “그다음엔?”

 “그다음엔 잘 팔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또 쉽게 판매대에서 빼지 않을 것 같은, 고전 같은 걸 두 권 고르는 거지. 아, 일본어로 되어 있을 테니 살짝 일본어를 공부해야겠네. 그리고 책 사이에 몰래 포스트잇을 끼워놓는 거야. 서로를 생각하며 떠올린,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적은 포스트잇을.”

 “서점 주인한테 일본말로 욕먹을 거 같은데.”

 “참나, 그러니까 해보는 거지. 포스트잇 정도 끼워놓는 건 책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쉽게 팔릴 책 아니면 끼워져 있는지도 모를 거야. 몇 년 후 다시 오타루에 온다면, 그때 같은 서점에 들러서 혹시 팔리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 고전 어느 페이지에서 서로의 문장을 찾는 거야. 어때, 특별하겠지?”

 “아니 그러다가 다시 못 가면 어떡해?”

 “그래도 괜찮아. 우리가 적은 문장들이 소박한 도시의 고서점, 두꺼운 책 한 페이지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련하지 않아? 아마 헤어져도 생각날 걸.”

 “잘 나가다가 꼭 안 해도 될 상상을 한다. 하여간 특이해.”

 너는 비 오는 그날 라디오를 듣다가 내게 그런 말들을 남겼다. 비 오는 날의 놀이공원은 끝내 가보지 못했지만, 함께 간 오타루 여행에서 우리는 정말 네가 계획한 대로 서점을 찾아, 서로를 생각하며 떠올린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두 권의 책 속에 각각 남기고 왔다. 물론 유서 깊은 고서점을 찾을 수 없어, 오타루에 있는 가장 큰 대형서점에 남기고 왔지만 말이다.    


           

 3              


 키쿠야 서점에서 운하 방향으로, 갔던 길을 되돌아오다가 기념품 가게 거리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가방 안엔 서점에서 구입한 안톤 체호프의 일본어판 『갈매기』가 들어있었다. 이층으로 된 카페는 마치 우리나라의 옛날 다방 같았다. 이층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탁자 위에 자그마한 재떨이가 보였다. 일본 사람으로 보이는 사내가 계단 쪽 테이블에 앉아 홀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창 너머, 눈길을 헤치며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외국인 관광객, 현지인으로 보이는 여행객,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스쳐가는 또 다른 사람들까지.

 가방 안에서 책 『갈매기』를 꺼냈다. 표지엔 작은 갈매기 한 마리가 붉은 커튼을 연 채 연극 무대 단상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막으로 나뉜 책 구성을 살펴보니 체호프의 희곡인 듯싶었다. 핸드폰을 꺼내 ‘체호프의 갈매기’를 검색해 보았다. 1896년 발표된 희곡 『갈매기』는 체호프의 가치관,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자전적 작품이라고 요약돼 있었다.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갈매기처럼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사랑과 꿈을 좇지만 총에 맞아 죽은 갈매기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는 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인간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그 대답을 찾고자 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다시 일본어로 쓰인 책의 페이지들을 넘기면서 책 한가운데 감춰져 있던 노란 포스트잇을 찾아 떼어냈다. 포스트잇에는 익숙한 너의 글씨체로 한국어와 일본어가 섞인 문장들이 쓰여 있었다.   

          

 一日一回だけでも一人で暖かくなれば、その人生があなたを熱くするでしょう。

 それはあなたを生きるでしょう。

 - 너의 일기에서 소중한 문장을 옮겨와 쓰다.        


 너의 일본어 글씨체. 여행을 위해 조금 배웠다고는 했지만, 아마도 한국에서 미리 적어왔거나,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서 쓴 것이겠지.

 우리가 다시 찾기 전에 책이 팔린다면 일본인이 구입할 것이기에 너는 일본어로 문장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책을 산 사람은 한국어와 섞여 있는 문장이 대체 무슨 사연을 갖고 있을지 궁금해 할 거라고. 체호프 작품을 구입할 정도면 문학에 대한 소양이 제법 있는 사람일 거라며, 미래의 그가 책을 읽다가 짓고 있을 표정을 상상하면 가슴이 두근대지 않느냐고 너는 말했었다.

 저 일본어 문장은 대체 무슨 뜻일까. ‘너의 일기’에서 옮겨와 썼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당시 너와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이인칭이었을 터. 그렇다면 포스트잇에 쓰인 ‘너’는 분명 나를 지칭하는 것일 텐데. 내 일기에서 네가 좋아하는 문장을 옮겨와 썼다는 말인가. 내가 언제, 어떤 문장을 썼길래 네가 일본에까지 와서 포스트잇에 남겼다는 것일까. 나의 일기. 너의 문장이 된 나의 문장. 나 역시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육 년 전 겨울, 너는 인천 부평의 이디야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그곳을 거의 매일 드나들었다. 오전 서너 시간, 언제나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 카페에서 취업공부를 했다. 연속되는 실패로 점점 삶이 싫어지던 이십대의 끝 무렵이었다. 눈을 뜨면 똑같이 반복되는 오전 공부와 오후 아르바이트. 불안정한 삶 속, 과연 탈출구가 있을까, 생각하던 때. 그때만 해도 자주 일기를 썼다. 마음이 힘든 날은 더했다. 카페에 오자마자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구석 테이블에 앉아 일기장부터 펼쳤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밀려오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그대로 문장으로 쓰진 않았다. 의지를 스스로 북돋고자 했던 긍정과 인내의 문장들을 일기에 쓰면서, 나는 그 시절을 이겨내려 노력했으니까.

 그날따라 오전인데도 카페엔 손님들이 많았다. 내가 주문한 커피는 한참이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별로 개의치 않고 쓰던 일기를 마저 썼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모든 손님들의 음료가 다 나왔는데도 내 커피만이 여전히 준비되지 않고 있었다. 너는 내 주문을 잊었는지 멍하니 앉아 쉬고 있었을 뿐. 나는 쓰던 일기를 펼쳐두고 다가가 네게 말을 건넸다.

 “저, 혹시 아직 제 주문이 안 들어갔나요?”

 그 말에 깜짝 놀란 네가 주문서를 들여다보더니

 “어머,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네게 오히려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다고, 천천히 해달라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단골 카페이기에 어쩌면 너도 내 얼굴쯤은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매일 커피 한 잔만 시킨 후 장시간 공부하는 모습이 다소 민망하기도 했는데, 겨우 커피 한 잔을 늦게 만들어준 것으로 사과를 연거푸 받으니 마음이 더 불편했다. 그러면서도 너의 진심과 친절함이 느껴져 왠지 모를 호감이 갔던 것도 사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네가 내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고 그대로 서서 펼쳐놓은 내 일기장을 보고 있었다. 왜 내 일기장을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다가가려는 찰나, 네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 일기장의 페이지를 카메라로 찍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네게 뭐 하시냐고 물었다. 너는 이번엔 별로 놀라지도 않은 채 웃으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내게 판매용 작은 스낵 하나를 건네면서. 나는 과자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왜 일기장을 사진으로 찍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너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천천히, 그러나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저기 혹시, 괜찮으시다면......”         



 4         


 구글 번역기의 카메라가 번역한 문장은 다소 이상했다. 이상하면서도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내가 정말 이런 문장을 일기에 썼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못 번역된 문장인 것 같았다.    


 하루에 한 번만 혼자 따뜻해지면, 그 삶이 당신을 뜨겁게 만들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을 살 것입니다.   

 - 너의 일기에서 소중한 문장을 옮겨와 쓰다.   

                 

 이런 이상한 문장을 네가 내 일기에서 옮겨와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원문이 육 년 전 내 일기장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꾸 저 이상한 문장을 반복해 들여다볼수록, 그것이 본래 어떠한 문장이었을지 이미 알 것만 같은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처음 서로에게 이어졌을 때, 네가 사진까지 찍어 보관하다가 이국의 어느 서점에 남긴, 이제 네 것이 된 나의 문장. 힘겨웠던 시기, 내가 어떤 글들을 쓰며 살아왔는지를 떠올리는 게 아주 어렵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러하니까. 네가 사라진 하루하루가 내게는 몹시도 힘겨운 나날들이니까. 이런 나에게 과거의 나는 어떤 말들을 해주었을까.     

 홋카이도를 떠나기 전날, 비에이와 후라노를 다녀오는 당일치기 버스 투어에 참가했다. 항공편을 끊자마자 급하게 알아본, 이번 여행 중 유일하게 미리 준비한 계획이었다. 너와 함께 했던 오 년 전 그대로의 여정 역시 이것으로 모두 끝을 맺을 것이다. 오오도리역 31번 출구 앞에서 한국인 가이드와 미팅을 마치기 전, 나는 너와 기념사진을 찍었던 TV타워 앞을 부러 오래도록 맴돌았다. 조금씩 다시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버스가 오전에 처음 닿은 곳은 흰 눈 가득한 설원의 패치워크로드. 어디가 언덕의 끝이고 하늘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하얀 세상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저마다의 추억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빴다. 나는 지난 너와의 추억을 회상하느라 눈밭을 서성이기만 했다.

 하얀 언덕 한복판에 외롭게 서 있는 유명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기 위해 버스가 다시 승객들을 설원 어딘가에 내려주었다. 멀리 보이는 키 큰 나무.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보이도록 특별한 사진을 내가 찍어주었었지. 사진을 너무 잘 찍었다며 기뻐하던 너의 표정이 떠올랐다. 버스 투어에 참가한 일행들이 저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 분주하게 움직일 때, 이십대로 보이는 한국인 커플 한 쌍이 소형 카메라를 들고 쭈뼛쭈뼛 홀로 있는 내게 다가왔다. 그 수줍은 젊음 자체가 내게는 흰 눈보다 더 눈부셔 보였다. 그중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혼자 오셨어요?”

 “네, 맞아요.”

 나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혹시 필요하시면, 저희가 사진 찍어드릴까요?”

 외로워보였던 걸까. 아니면 먼 배경의 추억사진이 그들에게 필요했을까.

 "전 괜찮아요. 두 분이 사진기사가 필요하신 것 같은데. 제가 저 나무 배경으로 잘 찍어드릴게요."

 둘은 기다렸다는 듯 고맙다고 말하며 카메라를 건넸다. 다정스레 포즈를 취하는 그들을 보니 과거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왠지 모를 다른 느낌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제 막 사랑이 새롭게 시작된 저 느낌. 언젠가 저들에게도 힘겹고 괴로운 순간이 찾아오겠지. 만약 그때가 오더라도 희망을 놓지 않기를. 세상에 지지 않기를. 그들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진 그때, 왜 갑자기 나 역시 더 열심히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을까. 가슴이 시리도록 왜 더 행복해지고 싶었을까. 단지 처음 보는 어린 연인들에게 겨우 소박한 사진 한 장을 찍어준 것뿐이었는데.    

 이번 겨울, 우리는 함께 다시 이곳을 여행하기로 계획했었다. 네가 그렇게 까닭도 없이, 마치 내 눈가에 떨어진 눈송이처럼 금세 녹아 사라지기 전까지는.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텅 빈 물결 속에 잠겨 흘러가기 전까지는.

 내겐 아직 남은 일이 있었을까. 사라진 우리의 여행을 다시 홀로 문득 떠나온 것은 이제 보니 너의 것이면서 나의 것이기도 했던, 소박하고 평범한 삶의 문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번역기로 어색하게 번역된 우리의 문장. 버스에 올라 투어의 마지막 목적지인 닝구르테라스로 떠나면서 구입한 엽서에 네가 남긴 문장을 다시 고쳐 써본다. 우리가 처음 시작된 그때, 너는 내 작은 미소에 잠시 따뜻했을까. 특별할 것 없는 내 서툰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싶었을까.           


 하루에 단 한 번만이라도 한 사람에게 따뜻해질 수 있다면, 그 삶이 너를 뜨겁게 할 거야.

 그게 널 살게 할 거야.            


 아마도 이런 문장이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이것은 내가 오래전 일기에 쓴 그것과는 또 분명 다를 것이다. 내뿜은 입김이 너의 가슴과 입술을 거쳐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것처럼, 여행 내내 귓가를 맴돌았던, 나와 함께 만들었던 너의 문장이, 오래전 그것과는 또 다르게 흰 눈송이로 내 가슴에 내려앉았으니까. 작디작은 갈매기의 날개가, 내게서 네게로, 네게서 내게로, 새하얀 눈의 깃털이 되어 우리 안에서 영영 평온한 잠에 들듯이. 그렇게 살아가듯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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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 2015년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으로 시를, 2024년 계간 『황해문화』 창작공모제를 통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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