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기억은 필름처럼 간헐적으로 남아있다. 외식은 소래포구나 희망백화점이었다. 희망백화점은 지금처럼 신세계백화점같이 대형백화점이 없을 때 있던 작은 백화점이었는데 지하에 가면 왕돈가스를 팔았다. 주방 후드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와중에 나온 돈가스는 너무 컸고 그래서 좋았다. 배불리 먹고 아동복 매장에서 꽤나 고급인 옷을 쇼핑하곤 했던 게 기억에 난다.
반면 소래포구의 기억은 별로 좋지 않다. 한 번은 외식하러 가는데 부모가 크게 싸웠고, 이유는 별 시답잖은 아버지 심기에 거슬리는 일이 있었거나 차가 막히는 상황으로 인한 짜증을 가족한테 푸는 용도였을 거다. 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음악의 김범수의 약속이었는데, 나는 지금도 이 음악을 들으면 우울해지곤 한다. 그 감정에 잠식되고 싶어 그 음악을 듣는 건지, 아니면 지금은 그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서 듣는 건지 가끔 헷갈린다.
어릴 적 상황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고, 한 번씩 그렇게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고 나면 그 여파는 며칠인가를 갔고 그래서 아버지란 무섭고 통제할 수 없단 인식으로 박혀 있다. 성인이 되고 칼을 들고 설치는 데는 내 힘으로 그를 막아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것도 참고 살다가 나중엔 경찰에 신고했다. 그 이후론 안 그런다.
그러던 사람이 늙어서 사과를 한다. 내가 학생땐 사과를 안 하는 것조차 억울했다. 하지만 사과를 하고 나자 '그럼 지금까지 내 마음에 남아있는 응어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물음이 발목을 잡는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며, 그런 감정적 표출을 했던걸 이해해 달라고 이젠 성장한 자식한테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불현듯 짜증과 화를 내는 가정과 가난한 가정을 택하라면 후자를 택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외벌이로 돈을 번게 힘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도 한 인간이었을 뿐이라며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어릴 적 전교 80등에서 30등으로, 30등에서 10등 이내로 들기 위해 새벽까지 공부하던 참이었다. 나는 코피가 자주 났다. 어머니는 어릴 때 보일러가 고장나 추운 방에서 나를 안고 꽁꽁 싸매고 있었다고 지나간 일로 말하며 그래서 비염이 생겼다고 말하지만 그게 진짜인지 아닌진 모르겠다. 하도 코피가 많이 나서 피가 나오면 지혈이 되도록 코를 잡고 휴지를 갖다 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많이 아픈 적이 있었는데 열이 오르고 머리가 띵한 게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난 내가 무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해진 분량을 회독하지 않으면 생각한 진도를 맞추기가 힘들었고 어릴 때부터 그런 진도에 집착하는 나였다. 나가야 할 페이지까지 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상황보다 자신에게 화를 내는 타입이었다. 그날도 '아프면 공부를 못하는데'이런 생각으로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평소 내게 하던 일상의 걱정-밥은 먹었는지 학원은 잘 갔는지-그런 강도의 10배가 되어 종종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소리가 들리더니 아버지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집을 잘 나가지 않는 그였기에, 아프고 혼미해지는 통에 누워있는데 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성적이 올랐더구나.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는 쪽지와 함께 약봉투에 든 해열제를 놓고 나갔다. 그는 따듯한 말 같은 건 한마디도 못하는 사내였다. 그런 건 쑥스러워서 하지 못하고 딸이 공부하는 게 기특하긴 한데 아픈 건 신경 쓰이니 약봉투를 놓고 간 것이었다. 그때는 그나마 인정받은 거 같아서 아팠어도 가슴에 그간의 일들을 용서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감정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런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건 아플 때만이었고, 낫고 나자 다시금 그런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아버지는 사랑을 돈으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입는 옷, 수업비, 학원비, 식자재값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게 그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돈을 벌면서 아이에게 감정적 케어를 동시에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전업주부인 어머니께 넘치도록 받았지만, 사람은 가진 건 당연하고 갖지 못한 건 결핍이 되는 것이기에 나는 항상 그의 사랑이 고팠다. 하지만 성장기에 그와 어떤 대화를 했는가 생각하면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사춘기땐 자식들도 부모를 피하긴 하니까, 나도 그를 피했겠지만 그래도 부모이기에 기대하는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거부해도 내 안위를 물어와 주길.
돈 때문에 싸우는 일이 잦았고 그땐 그가 잦은 이직을 하던 때였다. 엔지니어였던 자존심 강한 그가 대기업에서 나오고 나서 간 곳은 대부분 중소기업이었고 그중 대표와 갈등이 있으면 미련 없이 나와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고용의 불안정성이 '내가 쉬면 집을 부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에게 갖게 했던 것 같고 그럴 때마다 그는 어머니에게 화를 냈다. 어머니는 주어진 생활비로 가사를 꾸려갔음에도, 그에게는 어떤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던 것이다. 어쩌면 그도 누구에게 상황을 이해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표현하는 방법이 그에겐 '화'였고, 그건 집안내에서 누그러뜨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그 역할을 했으면 했으나 어머니는 경제력이 없었다. 내 삶을 찍어 누른 건 항상 돈이었다.
삶의 막바지에 가서 보면 '그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돌아보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때 그가 그렇게 상황의 미확정성 때문에 가족에게 부정적 표출을 하지 않아도 됐을 거란 생각을 할 땐 이미 생이 소멸해 가는 시점일 테지. 하긴, 나 조차도 업무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고성을 지르는 건 상황 '그 자체'에선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람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이니까. 하지만 [미래에는 하지 않았어도 될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나는 여전히 할 테고 그게 (만약 생길지도 모를) 동거인에게 전달될 거라 생각하면 나는 혼자 사는 게 맞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