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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아 Sep 10. 2024

미안해 할머니



할머니에겐 내가 첫 손주다. 어릴 때 할머니가 집에 오셨다가 가려고 하니 내가 할머니를 붙잡고 울었다고 한다. 지금도 할머니는 그때 일을 말하곤 한다. 자기희생적인 할머니는 아픈 몸을 이끌고 농사를 지어 명절 때면 그걸 다 모아서 자식들에게 나눠주느라 여념이 없다. 집에 오는 길엔 차에 짐이 너무 많아서 동생과 나는 거의 쌀포대에 눌려가면서 왔다. 할머니는 육 남매를 모두 장성시켜 (그들의) 결혼을 완수했다. 교육 측면에서도 변호사, 증권가 등 자식 자랑하기엔 남부럽지 않은 스토리로 동네 할머니들에게 자랑할 만도 하다.


할머니는 자식 챙기기에 일등이었지만 옛날 사람이라서 고모가 직장을 그만두고 변호사 한다고 하니까 '직장계속 다니지 뭐더러 공부를 한다냐'하고선 고모 사무실에 가서 있다 오곤 했다. 아버지 동생인 삼촌이나 고모는 우리 부모가 신혼일 때 집에서 하숙하며 대학까지 통근했다. 고모는 데리고 있는 사무장의 아들을 선보게 할 만큼 내 결혼에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난 결혼이란 제도에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적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는 '그럴 거면 차라리 이혼을 하지'라며 어머니에게 이혼을 종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핍박 속에서도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불합리함은 명절에 할머니댁을 가서도 볼 수 있었는데, 친가에 가자마자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계속 음식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과일을 깎고 종종거리는 어머니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이상했다. 남자들은 차려진 상을 먹기만 하는데 여자들, 특히 전업인 어머니는 계속 할머니의 싫은 소리를 들으며 일을 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할머니 앞에선 한마디도 못하고 집에 와서 내게 할머니 욕을 했다.




오늘 서점에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에 할머니 핸드폰 번호가 떴다.

"응 할머니"

"이번 명절에 인천 가냐"

언젠가부터 친가를 안 가는 걸 알면서 은근히 오길 원하는 말이었다.

"예 가야죠. 몸은 좀 괜찮으세요?" 사실 인천도 갈 생각 없지만 그랬다.

"몸이야 맨날 아프지. 만나는 사람은 있고?"

"결혼 안 해요"

그러자 할머니는 말했다.

"그래 요샌 세상이 무서워서"

라고 말했지만 누구보다 내 결혼을 원하고 있다는 건 부모님에게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묻는 빈번함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수화 너머로 집전화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들어가세요"란 말과 함께 통화를 종료했다. 할머니 집에서 봤던 명절의 불공평함과 우리 부모가 어떻게 싸웠고 그로 인한 갈등을 알고 있으면서 결혼을 원하는 할머니께, 그간의 일을 말하며 안 한다고 하는 건 어쩌면 할머니를 아프게 하는 말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할머닌 그저 좋은 마음으로 내가 힘들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삶을 꾸려나가길 원한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마치 인생처럼 좋은 날보다 나쁜 날이 더 많으며, 어머니의 시집살이를 경험해 온 나로선 쉽게 그 제도에 응할 수 없게 만든다. 나도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딜레마에 빠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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