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성 진통제

by 이서진

우울증으로 잠시 회사를 쉰 지 3주째다.


첫째 주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멍했다. 죽을 것 같아서 쉬겠다고 했지만 집에 있으니 패잔병이 된 것 같았다. 점점 더 가라앉았다. 있으면 안 될 시간과 장소에 있는 것처럼 낮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는 게 적응되지 않았다. 공간과 시간 모두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지난주엔 억지로 움직였다. 이렇게 멍하게 있다가는 누운 채로 죽을 것 같았다. 학교를 마치고 "엄마~!"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둥이에게 내 축 처진 모습을 더 이상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화요일부터 바빠서 예약만 하고 갈 수 없었던 병원 투어를 시작했다. 알레르기내과부터 통증의학과, 내분비내과, 류머티스내과를 쭉 돌았다. 오랜만에 병원에 간 기념으로 피검사를 했다. 엑스레이와 골밀도 검사, 폐기능 검사 등을 했다. 대학병원인 덕분에(?) 진료과 한 곳에서 피를 뽑으니 이 과 저 과에서 알아서 필요한 결과를 갖다 썼다. 역시 이곳저곳 아픈 사람들은 대학병원을 갈 수밖에 없다. 특히 정말 필요한 치료가 아니면 권유하지 않는, 수술 후 입원조차 짧게 시키는 대학병원이 믿음이 갔다. 진료비는 비싸지만 과잉진료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이틀에 한 번꼴로 대학병원을 다니고 있다.


그리고 삼주차가 시작됐다. 한없이 가라앉았다가 번갯불처럼 튀어 오르던 일상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병원 일정이 안정화됐다. 하루 루틴이 생겼다. 루틴 중 하나는 매일 잠들기 전에 다음날 먹을 약들을 일렬로 줄 세워 놓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약을 먹기 시작해 잠들기 전에 마지막 남은 약을 다 먹어 치운 후 다시 일렬로 줄 세운다. 오후 2시쯤 되면 먹어야 될 약이 절반은 사라지는데 그럼 아들 둥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다.


하루는 줄을 잘 못 세웠는지 남편이 믹스커피를 타다 건드린 건지 약 중 하나가 뒤집혀 있었다. 주면 주는 대로 하라면 하는 대로 하는 성의 없이 사는 인생이라 약 뒷면을 볼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몇 달 혹은 몇 년째 먹고 있었는지도 모를 약 뒤에 '마약'이라고 적혀 있었다. 눈에 잘 띄라고 빨간 네모까지 쳐져 있는 저 글자를 이제야 우연히 보게 됐다. 상비약으로 받은 약이지만 2~3일마다 최소 한 알은 먹는 약이었다.

KakaoTalk_20230417_125954413.jpg '마약'이라고 빨갛게 적혀있는 진통제

전문가(의사)에게 받아서 전문가(약사)에게 그대로 전달만 하면 끝나는 처방전은 거의 읽지 않고 준다. 의심하거나 궁금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분명 약사의 설명이 있었을 텐데 기억은 안 난다. 내친김에 지난주에 처방받아 온 약봉지들을 다 꺼내 읽어봤다.


면역억제 및 항염작용을 통한 염증치료제, 최면진정제 등 온통 불편한 단어들만 적혀있었다.


마약은 아니지만 '마약성 진통제'와 각성효과가 있는 '최면진정제'를 상비약처럼 먹으면서까지 '회사'를 다닌 내가 불쌍했다. 조직 생활에 더럽게 안 맞는 인프제(INFJ) 유형이 20년 가까이 군대 같은 조직 생활에 맞춰 사느라 참 애썼구나 싶었다.

마약 : 마취 작용을 하며, 습관성이 있어서 장복(長服)하면 중독 증상을 나타내는 물질을 통틀어 이르는 말


마취 작용. 나는 문득 이 약들이 내 몸의 통증을 마취시키는 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받는 부당한 대우에 느끼는 심적 고통을 마취시킨 게 아닐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봤다. 왜냐하면 이 약들을 먹는 중에도 아픈 곳은 더 늘어갔기 때문이다.


회사 문화는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테고 저 약들 중 어떤 것이든 더 먹고 싶지는 않은데 복직하면 '약을 먹다가 배가 터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난 죽지 않고 살아야 되고 살림을 꾸리고 아들을 키워야 되니 복직을 할 테고 마약성 진통제든 뭐든 또 마구마구 입에 쳐 넣고 있을 것이다. 뭔지도 모른 체. 마약성 진통제는 완전한 마약은 아닐 테니, 의사 선생님들이 알아서 잘 처방해 주시고 약사 선생님께서 안전하게 조제해 주실 테니 1도 의심하지 않고 와구와구 꿀떡꿀떡 삼키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야 될 테니.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