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멈췄던 장맛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 탓에 온통 잿빛이다.
주룩주룩... 인지 톡톡... 인지 모르겠지만 엊저녁부터 줄기차게 내리는 비가 벌써 지겹다.
누군가 죽었다 해도 눈물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날씨.
"난 우리 엄마 돌아가셨을 때보다도 아주머니 돌아가신 게 더 황당한 거 같아. 전혀 예상을 못 했어서 그런가?"
"났으니 가는 거 당연한 건데. 다들 적당한 때에 가면은 얼마나 좋을까?"
"적당한 때가 언제인데?"
"80?"
"야, 80 돼 봐라.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 맨날 꼬부랑 노인네들 보면서 저렇게까지 오래 사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자긴 80까지만 살 거라고. 근데 80 되던 해에. '어, 할아버지 올해 돌아가셔야 되는데?' 그랬더니 '그건 아니다'하시는데, 그렇게 5년씩 연장해서 90까지 가시더니 뭐, 그때도 아직 아닌 거 같으시다고."
(생략)
"없다. 적당한 때가."
- <나의 해방일지> 14화 中-
죽기 적당한 타이밍이 있을까?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결혼도 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눈빛을 가졌던 친할아버지는 그 눈빛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 삶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죽음'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양쪽 할머니들이다.
왠지 짠하고 정이 가는 외할머니와 그냥 미운 친할머니.
도무지 가만 계시질 못하는 성격 탓에 고생만 하다 가신 외할머니와 웬만해선 본인 몸 움직이는 걸 싫어하셔서 그림처럼 가만히만 계셨던 친할머니.
암에 걸리고 40kg도 안 나갈 정도로 지겨운 투병생활을 하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고도 비만임에도 100세도 넘은 나이에도 살아 계시는 친할머니.
어느 날 큰고모가 엄마한테 말했다.
"올케, 내가 절에 갔다가 스님께 여쭤봤거든. 저승사자가 우리 엄마 데리고 가는 걸 깜빡 놓쳤다지 뭐야. 그래서 다음 순서가 언제 올지 모른다니 우리도 잊고 있자고."
조심스럽고 죄스럽지만 친할머니가 저승으로 언제 갈지 궁금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아무튼 저승사자도 깜빡할 정도로 오랫동안 사시는 친할머니는 몇 달 전 선망증세가 심해져 요양병원에 입소했다. 아빠는 친할머니가 시집살이를 굉장히 호되게 당했다며 안타까워하셨지만 내 기억 속 친할머니는 그저 집 안에서만 생활하시는 분이었다. 내가 여섯 살이었을 때도 집에서만 생활하셨던 친할머니였으니 거의 삼사십 년을 집에서 지내셨다. 친할머니에 대한 정이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불쌍하다는 생각보다 경제활동 없이 몇십 년을 집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게 부럽기만 했다.
그렇게 가만히만 계시던 친할머니가 자꾸 어디로 나가고 싶어 한다고 요양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가고 싶은 곳이 딱히 있는 거 같지도 않은데 실외에만 있고 싶어 한다고. 아빠랑 고모는 평생을 집에서만 지낸 할머니의 답답한 마음이 이성이 약해진 틈을 타 본능적으로 나온 것 같다고 안타까워하셨다.
외할머니 역시 본능이 이성을 앞서던 때가 있었다. 바로 돌아가시기 전이었다.
친할머니와 정반대로 외할머니는 하루도 집에서 편히 계신 날이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문배달을 했고 형편이 좀 나아졌을 때도 외숙모가 운영하는 식당일을 도와주셨다. 외할머니는 '어디 가서 확 죽어버리면 죽겠다.'는 말을 늘 달고 사셨다. 병에 걸리더라도 절대로 치료하지 말라는 당부도 하셨다.
하지만 1년 정도 이어진 암투병은 외할머니의 이성을 뺏어갔다. 의식이 없어진 외할머니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셨다. 입으로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자 병원에서는 '밥주사'라는 것을 처방해 줬는데 외할머니는 오래 살고 싶다며 제일 비싸고 좋은 주사만 놔 달라고 했다.
항상 죽고 싶어 하던 소원이 이뤄질 때가 됐는데.
외할머니는 마지막이 돼서야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드라마 속 대사처럼 죽기 적당한 때는 없지 않을까?
현재 삶에 만족한다면 좋은 것들을 놔두고 떠나기가 아쉬워 죽지 못할 테고
고생만 한 사람이라면 고생만 한 게 억울해 죽지 못할 것 같다.
결혼 한 번 못해봐서, 자녀가 어려서, 자녀가 결혼한 것을 못 봐서, 손주가 재롱 피는 것을 못 봐서 등 온갖 이유로 죽기 싫어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할머니들처럼 억눌리던 본능이 이성을 뚫고 표출됐다면 시간의 방향이 달라질 때가 된 게 아닐까?
죽고 싶어 하던 외할머니가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것처럼
평생을 집에서만 지내던 친할머니가 외출을 원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