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마주 보고 앉는 게 불편하더라고. 사람을 정면으로 대하는 게 뭔가 전투적인 느낌이야. 공백 없이 말해야 된다는 것도 그렇고. 어딜 가나 속 터지는 인간들은 있을 거고. 그 인간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고. 그럼 내가 바뀌어야 하는데.
나의 이 분노를 놓고 싶지 않아. 나의 분노는 너무 정당해.
너무너무 정당한 이 분노를 매번 꾹 눌러야 되는 게 고역이야.
- <나의 해방일지> 제4화 中 상민의 대사 -
"<나의 해방일지> 드라마를 몇 번 봤다고?"
"한 세네 번?"
거짓말이다. 정확하게 열 번 하고도 두 번이나 더 봤다.
그러니까 현재까지(앞으로도 분기별 1회 이상은 볼 예정이라) 총 12번 정주행 했다.
같은 드라마를 열두 번이나 봤다고 하면 나를 '히키코모리'로 오해할까 봐 오히려 줄이고 줄여서 말해야 되는 드라마가 바로 <나의 해방일지>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박해영 작가님의 <나의 아저씨>는 이보다 더 많이 봤다. 그래서 드라마 장면과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내 생각보다 박해영 작가님의 드라마 속 인물들의 대사가 먼저 떠오른다.
특히, 모든 관계가 '노동'이라는 대사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항상 생각난다.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의지, 의도와 관계없이 모든 관계에서 '노동'에 준하는 지침과 피곤함을 느끼는 주인공 염미정.
이혼 후 남겨진 딸과 살짝 센 두 명의 미혼 누나와 사느라 또 피곤한 조태훈.
내성적인 자신을 가만히 놔두지 사회 정당한 분노를 느끼는 박상민.
내성적임에도 묵묵하게(힘들게) 대기업을 다니는 위 세 명은 회사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는다.
바로 별것도 아닌, '사내 동호회 가입'이다.
(미정) 동호회 꼭 해야 되나요?
(향기(행복지원센터 직원)) 뭐, 꼭은 아니지만 직장생활이라는 게 뭐 별 거 없잖아요. 뭐, 무슨 일이든 6개월만 지나면 그 일이 그 일이고. 그래도 인간관계만 좋으면 다닐 만하니까. 일의 능률도 오르고.
- <나의 해방일지> 제1화 中 -
인간관계를 노동이라고까지 여기는 사람에게 동호회 가입이라니. 그것도 회사 사람과 함께하는? 요즘처럼 무더운 한여름날 한껏 열을 받은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곰국을 쳐 먹는 것과 같은, 더워 죽을 것 같은 답답함.
(상민) 자네도 동호회 안 들었나?
(태훈) 네.
(상민) 관심 병사 같은 건가? 내성적인 사람은 그냥 내성적일 수 있게 편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나?
- <나의 해방일지> 제1화 中 -
하지만 회사는 지치지 않고 이들을 계속 압박한다.
'일만 해서는 안되고 사람들과도 유연하게 지내야 돼. 심지어 타 부서 사람들과도 인맥을 구축해야 돼. '라고.
(상민) 밥 먹는 시간까지 사람 부담스럽게. 내가 회사 전 직원 다 알아야 돼? 다른 부서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서 뭐 하려고? 내 부서 인간들이랑도 힘든 판에. 학교 때 오락부장들만 모아놨나? 동호회 드나 봐라.
- <나의 해방일지> 제2화 中 -
학교 때 오락부장만 모아놓은 것처럼, 직원끼리 활력 넘치는 점심시간은 내성적인 세명에겐 상당히 불편한 시간이다.
결국 내성적인 세 사람은 일을 벌인다.
회사로부터의 동호회 가입 압박도 피하고, 성향에 맞지 않는 동호회 활동을 억지로 하지 않기 위해 <해방클럽>이라는 신규 동호회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상민) 진짜 인권위에 신고해 버릴까?
(태훈) 그냥 우리끼리 하죠. 아무거나. 동호회 들기 전까진 계속 불러댈 거 같은데. 우리 셋이 한다고 하고. 안 모여도 상관없잖아요.
-생략-
(미정) 우리 진짜로 하는 건 어때요? 해방클럽. 전 해방이 하고 싶어요. 해방되고 싶어요. 어디에 갇혔는지 모르겠는데 꼭 갇힌 거 같아요. 속 시원한 게 하나도 없어요. 갑갑하고 답답하고.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상민) 해방. 좋다.
- <나의 해방일지> 제3화 中 -
조용하지만 눈에 띄는 세 사람처럼 이름부터 다소 황당한 <해방클럽>.
행복지원센터 직원 향기는 의아해한다.
(향기) 어... 세 분이서?
(상민) 네.
(향기) 어, 해방이 뭐 하는 거예요?
(상민) 대한민국은 1945년에 해방됐지만 저희는 아직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향기) 음. 음? 끝? 아니 뭐. 아, 그래서 세 분이서 뭘 하시겠다는...
(상민) 해방할 겁니다.
- <나의 해방일지> 제3화 中 -
1945년 대한민국 해방을 들먹거리며 단호하게 '해방'을 얘기하는 상훈과 단단한 표정으로 이를 지지하는 미정과 태훈. 의심을 품은 향기. 우스꽝스러운 배경음악과 달리 셋은 무척 비장하다.
(향기) 제가 일부러 깐깐하게 구는 건 아니고요. 그렇잖아요. 저도 감사라는 걸 받는데 해방클럽이 뭘 하는 곳인지. 증거 자료는 남겨야 되잖아요. 없어요? 뭘 한다? 뭐라도...(당황한 웃음) 그럼 일지라도 쓰시든가요.
(상민) 이 나이에 일기 써서 검사 맡게 생겼어? (한숨) 왜 이렇게 화가 나냐?
- <나의 해방일지> 제5화 中 -
이렇게 <나의 해방일지>는 탄생한다.
드라마 제목 <나의 해방일지>은 염미정, 조태훈, 박상민으로 구성된 해방클럽 회원들의 성장일지다.
해방클럽이 탄생된 데는 고지식할 만큼 맡은 바 업무를 끝까지 해내고야 말겠다는 행복지원센터 직원 향기의 공도 크다. 그녀가 매우 꾸준히 내성적인 직원에게 동호회 가입을 부축이지 않았다면 해방클럽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또 동호회 활동실적 증빙을 요구한 덕분에 <나의 해방일지>가 생겼으니, 여러 등장인물 중 향기의 역할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16부작 드라마인데 5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의 해방일지>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는 내성적인 세 사람의 동호회 가입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컸다는 것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
<해방클럽>은 내성적인 사람들의 모임인만큼 느리게 결성됐고, 시끌벅적한 뒤풀이 없이 조용히 운영됐지만 각자의 삶을 진중하게 바라보며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갔다.
해방클럽의 무게를 모르는, 열등감에 찌든 가벼운 사람들의 비웃음조차 무시한 채.
(준호) 난 마라톤 동호회 해 볼까 하는데.
(수진) 저희 마라톤 동호회 있어요?
(준호) 개설해 보려고. 같이 할래?
(수진) 마라톤은 안될걸요?
(준호) 해방클럽도 되는데 마라톤이 안 될라고.
(수진) 격한 스포츠는 사고 위험 때문에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준호) 그래?
(준호) 해방클럽은 뭐 하는 데야? 뭐에서 해방되는 건데? 일?
(미정) 인간 한테서요. 지겨운 인간들한테서 요.
- <나의 해방일지> 제11화 中 -
회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곳이다.
하지만 종종 원래 목표인 '일'보다 '사람' 즉, 인간관계가 중요시되며 심지어 강요된다. 강요되는 인간관계에서 피로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2019년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의 조사에 따르면, 인간관계 스트레스로 퇴사를 고민한다고 응답한 직장인이 전체 응답자의 71.8%에 달한다고 한다.
강요되는 인간관계, 그래서 모든 관계를 노동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회.
우리의 분노는 너무너무 정당하다는 상민의 말은 옳다.
너무너무 정당한 이 분노를 매번 꾹 눌러야 되는 것 역시 고역이 맞다.
그렇다면 정당한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
박해영 작가님은 그 해답을 상민의 대사 속에 넣어놨다.
"내성적인 사람은 그냥 내성적일 수 있게 편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나?"
업무 외 관계를 강요하지 않고, 무리하게 다가오지 말고 그냥 놔두면 된다. 하지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한국 조직문화의 특수성(기이성) 때문에 그게 가능한 회사는 아마... 극소수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분노는 정당하다.'는 상민의 대사는 당분간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