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빛나는 지구, 부루마블

by 이서진

부루마블은 내가 태어난 1982년에 출시된 우리나라의 보드게임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사랑받는 씨앗사의 대표 아이템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많이 약했고 자주 아팠다.

그래서 친구들과 귀여운 꿈돌이가 있는 대구 엑스포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대신 등교를 했다.


6학년 전교생 중 수학여행을 못 간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 정도였다.

나처럼 아파서, 혹은 수학여행 비용이 없어서 못 간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한 교실로 모였고 조용함으로써 소외받은 아이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학교는 조용했다.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은 수업 대신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

남겨진 아이들이 잘 있는지 교감 선생님께서 한 번씩 우리를 보러 오는 게 전부였다.

어색하고 조용하고 심심한 첫날이 지났다.


그날 저녁, 엄마는 아파서 수학여행에 가지 못한 나를 데리고 문방구로 가셨다.

그리고 내가 몇 달 전부터 사달라고 조르던 것을 사주셨다. 바로 부루마블 게임이었다.


다음날, 나는 그 큰 보드게임을 학교에 갖고 갔다.

우리는 부루마블 게임을 함께하며 다시 즐겁고 신나는 초등학생이 됐다.

이름조차 묻지 않던 조용한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사위를 굴리고 비행기로 된 말을 옮겼다.

게임을 하는 아이들은 씨앗증서를 구입한 땅에 열심히 건물을 세웠고 은행을 맡은 아이는 신나게 돈계산을 했다. 부루마블 게임은 소외된 아이들을 활발한 개구쟁이로 만들어줬다.


수학여행이 끝났다. 반 친구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소외된 아이들은 각자의 교실로, 부루마블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나의 게임 상대는 언니였다.

언니와 나는 가성비가 높은 '서울'을 차지하기 위해 머리를 썼다.

서울과 같은 줄에 있는 검은색 표시의 수도들도 경쟁의 대상이었다. 도쿄, 뉴욕, 런던, 파리, 로마였다.

의외로 한 번씩 잘 걸리는 부산과 제주도도 인기가 높았다.


언니와 나를 조마조마하게 만든 건 '황금열쇠'였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정봉이 미옥에게 준 '우주여행' 카드와 통행료 지불을 면제해 주는 '우대권'을 확보하면 마음이 든든해졌다.

반면에 든든하게 느껴진 건물을 짐처럼 느끼게 해주는 '정기종합 소득세'카드와 가장 비싼 땅을 반액에 처분해야 되는 '반액대매출' 카드는 뽑기 싫은 카드 중 하나였다. 황금열쇠의 지령에 따라 언니 앞에서 장기자랑을 하거나 후반전엔 통행료로 수입을 올리기 위해 일부러 무인도에 갇힌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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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의 10대를 함께 보냈던 부루마블은 언니가 대학교를 가면서 그저 구석에 있는 물건이 됐다.

나는 성인이 된 후 보드게임보다 재밌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부루마블은 그렇게 옷장 속에 갇힌 채 잊힌 물건이 됐다.


부루마블은 20년 동안 옷장 안에 있었다.


20년 동안 우린 어떻게 변했을까?

언니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취직을 하더니 일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나는 회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태어난 아들은 나와 똑같은 말썽을 부리면서 건강하게 자랐고 어느덧 4학년이 됐다.


아들 둥이가 냉방병에 걸려 며칠째 친구와 놀지 못하고 심심해하던 지난 여름방학,

갑자기 부루마블 게임이 생각났다.

여고시절, 친구들과 조심스럽게 땅 속에 묻은 타임캡슐을 꺼내듯 옷장 앞에 의자를 가지고 섰다.

의자로도 모자라 까치발로 디디며 힘들게 부루마블 보드게임을 꺼냈다.

정확하게 29년 전에 샀던 보드게임 상자의 먼지를 조심스럽게 닦고 케이스를 열었다.

칸칸이 정리할 수 있게 구분이 잘 된 케이스 덕분에 지폐와 씨앗증서, 황금열쇠가 잘 보관 돼 있었다.

KakaoTalk_20230919_143400856.jpg 30여 년 간 나와 놀아준 게임친구, 부루마블!~
KakaoTalk_20230919_142719718.jpg 아들과 부루마블 게임 중~!

몇 번의 연습게임을 하고 나니 둥이도 게임규칙을 이해한 듯했다.

나와 둥이는 29년 전과 똑같이 서울을 차지하기 위해 애썼다. 두 개의 주사위 눈금이 같기를 희망하며 굴리고 한 칸 한 칸 희열과 실망을 느끼며 말을 옮기기도 한다.

둥이는 엄마가 제 땅에 걸려 통행료 벌금을 내는 것도, 황금열쇠를 뒤집어 제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재밌어했다. 엄마와의 연습으로 자신감이 붙은 둥이는 방학 내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을 초대해 게임을 했다.


29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나는 학생에서 아줌마가 됐고, 내 옆에는 부모님 대신 남편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 없던 아이는 제법 청년티가 나는 남학생으로 자랐다.

오래된 내 친구 부루마블에겐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바로 내 아들 둥이다.


비록, 도쿄가 '도오쿄오'라고 적힌 오래된 부루마블이지만

나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줬듯 내 아들 둥이에게도 즐거운 게임친구로 오래도록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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