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by 이서진
...... 살아 있다는 것. 우리가 그 골목에서 간이숙박소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야. 일상에 매여 일 년을 통화 한번 못 한다고 해도 수첩 속에 오래된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다는 것. 내 손을 뻗어 다른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 설령 내가 언니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언니가 이 세상의 어느 공기 속에서 아침마다 눈을 뜨고 숨을 쉬며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가고 있었다면...... 나는 내 열여섯에서 스물까지의 시간과 공간들을 피해오지 않았을 거야. 내가 기억 한들, 언제까지나 기억한들...... 그런들......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지? 기억으로 뭘 변화시켜 놓을 수 있어?

......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생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과 비틀거리며 긴 담장을 따라 걷는 것을 보았다...... 그런 표현들을 쓸 수 있는 건 그녀가 살아 있어야만 가능하지. - 신경숙, <외딴방> -

얼마 전, 신경숙 작가님의 소설 '외딴방'과 '깊은 슬픔'을 양장본으로 구입했다.

25년 만에 다시 보는 책.

내가 과연 기억할 수 있을까? 혹시 '외딴방'이 아니고 '깊은 슬픔'이었던가.


다행스럽고 놀랍게도 이 문장을 보자마자 알아봤고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으로 시작해 '그녀가 살아 있어야만 가능하지.'까지는 내가 열여섯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통째로 외웠던 부분이었다. 소설 속 '나'가 피하려고 애썼던 열여섯에 나는 이 소설을 알게 됐다.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H는 모든 것이 완벽한 아이였다. 얼굴도 예뻤고 공부도 잘했고 체육도 잘했다. 거기다 성격까지 좋아서 모든 아이들이 H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


나 역시 H를 무척 좋아했다. 특히 H의 글씨체와 핸드크림 향기, 독서하는 모습이 좋았다.

H는 신경숙 작가님 소설 중 외딴방을 가장 좋아했다.

내가 외운 부분은 H가 일기장에 필사한 부분이었다.

또박또박 예쁜 글씨체로 적힌 시니컬한 글을 보고 심취하지 않을 여중생이 있을까.

소설을 통째로 외운 덕분에 그 애와 잠시나마 가까워질 수 있었다.


아쉽게도 고등학교를 달리 가며 H와 멀어졌다. 나는 여전히 소설을 외우고 있었지만 H는 없었다.


싸이월드가 한창일 때 잠시 연락이 됐지만 H가 독일로 유학을 가며 연락이 끊겼다.

독일 어딘가에서 건축가로 살고 있다고.


25년 만에 '외딴방'을 다시 읽었다.

내가 외웠던 부분을 보면 기억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간이숙박소, 악다구니, 생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를 보자마자 다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 보면서 내게 소설 속 '희재'와 같은 H를 잠시 떠올렸다.

그때 우리는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80년대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연락은 되지 않지만. H는 어딘가에 살아 있을 테니...

소설 속 문구를 빌려 쓰자면 나는 언젠가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생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과 비틀거리며 긴 담장을 따라 걷는 것을 보았다......
KakaoTalk_20230926_102704844.jpg 내가 참 좋아하는 신경숙 작가님 소설. 올해 가을, 다시 한번 읽어볼 예정이다.


* Pixabay로부터 입수된 Frank Winkler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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