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길을 걷다 우연히 빨간 우체통을 보았다.
언제부터인가 거리를 걸으며 우체통을 보는 일이 흔치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에는 편지나 엽서를 써서 우표를 붙이고, 빨간 우체통 안으로 넣어 보내는 일이 자주 있었다. 누군가에게 편지가 언제쯤 도착할지 기다리며 설레어하던 시절, 그런 아날로그의 감성이 이제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게 왠지 모르게 아쉽다.
이제 편지 대신 카톡이나 디엠을 보내는 일이 더 익숙해진 시대가 되었고, 우체통 앞을 서성이는 사람은 보기 힘들어졌다. 이렇게 점점 사라져 가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나 역시 아날로그 감성을 그리워할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오래된 추억이 점점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 사라지는 것들이 안타깝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특히나 요즘은 장례식장 앞에 살다 보니 자연스레 생각이 많아진다.
무언가 사라진다는 것,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빨간 우체통처럼 우리가 기억하고 있던 무언가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사람 역시 결국은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쓴 시집 『예보에 없던 비가 내립니다』에는「국화꽃 한 송이」와「예정된 슬픔」이라는 두 편의 시가 실려 있다. 두 시 모두 장례식에서 느낀 슬픔과 그리움을 표현한 시이다.
「국화꽃 한 송이」의 일부는 이렇다.
“떨리는 손으로 국화꽃 한 송이를
조심스럽게 올려놓는 네 모습
그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침묵만이 내 마음을 대신한다”
이 시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국화꽃을 올려놓던 모습을 떠올리며 쓴 것이다.
그 순간은 슬픔과 위로가 뒤섞인, 잊히지 않는 장면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하고, 그저 침묵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 기억은 여전히 내 마음에 깊이 남아 있다.
또 다른 시 「예정된 슬픔」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분명히 태어나서 살게 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는 뜻일까,
말소되는 주민등록증, 사라지는 흔적
아직 내게 예정된 슬픔은 많이 남아 있다
조금은 두렵다”
가족이 세상을 떠나면 사망신고를 하면서 고인의 주민등록증을 제출해야 한다.
그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이제 정말 사라지는구나.’
주민등록증이 말소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남겨진 것은 고인의 유품뿐이다. 이제 그 사람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진 속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잊힐까 두렵다.
나 역시 언젠가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다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무서운 게 아니라, 오히려 잊힌다는 사실이 더 두렵게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히고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당연한 일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문득 생각한다.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누군가가 나를 그리워해줄까. 아주 가끔이라도 나를 떠올리며 기억해 줄까. 내가 남긴 흔적과 기억들이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에게도 아직 강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나는 가족을 두고 쉽게 떠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내가 떠난 자리를 가족들이 어떻게 채우며 살아갈지, 그들도 언젠가는 나처럼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 살아갈 것이고, 다시 그들의 시간도 흘러 언젠가 나를 따라오겠지 하는 생각에 이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결국 인생이란 태어나고, 살아가고, 그리고 어느 날 떠나며 끝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끝에서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건 그리움과 추억이라는 흔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소중해진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고, 끝이 있음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인생인 것이다.
오늘도 장례식장 앞을 지나며 사람들을 바라본다.
누군가는 슬픔에 울고, 누군가는 슬픔을 견디며 또 다른 하루를 살아간다.
빨간 우체통도 언젠가는 거리에서 완전히 사라지겠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의 편지 한 장과 함께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이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 되고, 잊힘 속에서 작은 흔적을 남기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두려움보다는 희망을 품기로 한다. 언젠가는 사라질지라도, 나를 기억할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과 추억을 남길 수 있도록.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하루하루를 충실히 기록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결국 사라진다는 건 변치 않지만 그 사라짐 속에서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조용히 남아 있을 작은 흔적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조용히 안도하며 살아가기로.
“결국 인생이란 태어나고 살다가 떠나며, 또 누군가에게 그리움을 남기는 일이겠지.”
그렇게 나는 오늘도 사라짐과 존재의 경계에서 천천히 내 삶의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