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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샤펠 이야기

뉴스저널리즘 '정은주의 클래식 산책'


엄마를 증오하는 어린 피아니스트의 연주 [정은주의 클래식 산책]


영화 '뮤직 샤펠'



한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겪는 수많은 감정들은 그 사람의 삶을 천천히 채워갑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우리는 편하고 행복한 감정들이 더 많이 모이고 쌓이길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 세상살이가 그렇습니까. 예측불가한 일들은 일상의 한 부분이고, 피하고 싶은 일들은 잊을 만하면 찾아오며, 심지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에 좌절하며 몇 년에 한 번씩 주저앉기도 하지요.


수많은 필연의 슬픔 중에서 정말 짜증나고 또 피하고만 싶은 경우를 골라보자면,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문제나 환경에서 일방적으로 받는 상처입니다. 예를 들자면 가족 간의 문제 등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모나 형제를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가족 문제의 원론적인 슬픔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에 가정 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었다거나,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낳아 기르던 사람이었다거나 하는 정말 내가 미쳐 손도 써볼 수 없던 영역의 아픔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가족을 사랑해야한다고 강요받으며 살아야 했고,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의 분노를 느꼈어도 내 가족이니까 차마 말하지 않고 넘어가곤 했습니다. 이런 일은 누구나 한 번쯤 가슴에 묻어둔 사연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사랑하는 가족을 미워하는 감정이 곪아가고, 그를 수렁으로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그의 삶을 온통 채운 가족을 미워하는 마음이 만든 결과로요.



지난 2023년 개봉한 클래식 음악 영화 <뮤직 샤펠>(감독 도미니크 데루데르)은 클래식 음악 영화의 품 안에서 가족 간의 문제로 고통 받아야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어쩔 수 없었던 부모의 문제를 평생 마음에 묻은 채,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어린 피아니스트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과 함께 흐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어리고 여린 한 소녀, 제니퍼가 겪었던 가정 폭력의 모든 장면들에 진심으로 참 아팠습니다. 그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 어린이였으니까요. 아이는 가정에서의 충격적인 사건들 속에서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히 그 아이는 음악 천재성을 가졌습니다. 음악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잊고 성장해나갑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고픈 어떤 메시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별한 아이의 특별한 무대




"넌 미국에 가서 살게 될거야. 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의 찬사를 받게 될 거야. 넌 특별한 아이야."


<뮤직샤펠> 중 제니퍼의 어머니가 제니퍼에게 들려주는 말




제니퍼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꾸리며 살아갑니다. 그 때 제니퍼의 엄마는 딸의 음악 천재성을 알아봅니다. 딸을 위해 작고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팔고, 대형 그랜드 피아노를 샀습니다.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그랜드 피아노 구입을 두고 제니퍼의 부모는 부부싸움을 벌입니다. 그때 제니퍼의 아빠는 도끼로 그랜드 피아노를 부숴버립니다. 그때부터 어린 제니퍼에게 피아노는 커다란 짐이자 유일한 안식이 됩니다.


그러다 제니퍼의 아빠가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집 앞에서 동사(冬死)합니다. 이후 어린 제니퍼는 엄마와 단 둘이 살며 피아니스트로 성장합니다. 제니퍼는 어려서도 커서도 어머니에게 칭찬 같은 압박 혹은 그 어떤 것이라도 부담스러운 말을 듣습니다. 마음 한 편에는 어머니를 증오하지만, 제니퍼는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목표 하나로 버텨냅니다.



어머니의 주문처럼 제니퍼는 뉴욕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합니다. 어린 시절 제니퍼가 살았던 벨기에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경력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콩쿠르,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를 위해 홀로 떠납니다. 예상대로 제니퍼는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리스트에 선정됩니다. 그리고 파이널리스트는 누구나 예외 없이 참가해야 하는 뮤직 샤펠에 도착합니다.


영화의 배경이자 실제로 벨기에에서 열리는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오랜 역사와 함께 독특한 파이널 전통이 있습니다. 세미파이널에 24명, 파이널에 12명을 뽑고요. 12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은 벨기에 워털루에 위치한 퀸엘리자베스 뮤직 샤펠에 7일 동안 머물며 외부와 단절된 채 지내야 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을 위해 창작된 새 협주곡을 익히며 콩쿠르 결선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해야 합니다. 이 전통은 성악 부문은 제외합니다. 이 영화도 실제 퀸 콩쿠르 파이널리스트들이 뮤직 샤펠에서 보내는 일정을 바탕으로 흘러갑니다. 제니퍼를 포함한 12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은 예외 없이 뮤직 샤펠에 도착합니다.


제니퍼는 결선 무대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선택했습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이 작품을 통해 슬픔을 딛고 일어섰는데요. 제니퍼가 이 곡을 결승에서 연주하고 또 무사히 마친 모습은 어린 제니퍼가 그동안 애써 피했던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솔직히 마주하고 그것을 해결하려 일어섰다는 결심이라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평생 숙원이던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 제니퍼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를 온 열정으로 마칩니다. 대기실에서 쉬던 제니퍼는 뜻밖의 방문을 받습니다. 절대 제발 무슨 일이 있어도 오지 말아 달라 부탁했던 제니퍼의 엄마가 기어코 온 것입니다. 자신의 대기실에 불쑥 찾아온 엄마를 향해 제니퍼는 절규를 퍼붓습니다. 제니퍼와 엄마는 보통의 어머니와 딸의 갈등과 비교할 수도 없는 어떤 끔찍한 벽으로 갈라진 지 오래입니다. 제니퍼의 마음속에서 먼저요. 사이에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비극이 감춰져있었으니까요.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힌 어느 밤, 제니퍼는 아버지를 얼어 죽게 내버려 둔 어머니를 향해 키웠던 배신감과 증오를 떠올립니다. 그 모든 비극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폭발합니다. 그리고 제니퍼의 모습과 시리도록 아름다운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이 어렵게 무겁게 그리고 눈물겹게 흐릅니다. "나는 엄마를 증오합니다. 그래서 피아노를 연주합니다"라고 말하는 제니퍼의 표정이 들리는 듯합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꺼내보고 싶고 가족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누군가에게 꼭 한 번 추천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뮤직 샤펠> 빛낸 3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제니퍼가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의 파이널리스트 무대에서 연주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라흐마니노프가 실제로도 슬럼프와 우울증에서 벗어나, 다시 작곡가로 용기를 내 발표한 작품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그의 대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받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작품 중 하나다.



라흐마니노프 <Op. 3의 2번>



라흐마니노프가 19세 때 작곡한 피아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라흐마니노프만의 음색과 음악적인 특성이 녹아있는 초기 작품으로, 피아니스트들의 연주회 앙코르 곡으로도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다.



라흐마니노프 <Op.34의 14번>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시인들의 시에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붙여 한 편의 가곡을 만들었다. 보칼리제라 부르는 이 작품에는 총 14곡이 수록되었는데, 마지막 곡인 14번에는 가사가 없이 음악만 작곡했다. 이 작품은 무척 아름답고 서정적인 라흐마니노프만의 감성이 잘 녹아있으며, 피아노 뿐만 아니라 현악기의 편곡으로도 많이 연주되는 작품이다.


| 정은주 (음악 칼럼니스트) '알고 보면 흥미로운 클래식 잡학사전' 저자 



https://www.nget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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