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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Oct 30. 2022

5. 떠드는 사람 안 적으면 안 될까

15. 초등학생이 되다     


  아이가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를 둔 엄마라면 누구나 겪을 일이지만 다시 생각해도 그날 그 감동은 불을 처음 발견한 사람의 심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귀한 불을 혼자서만 사용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 모색의 길로 첫 발을 디딘 아이에게 박수를 치고 또 치며 축하했다. 

  차 두 대가 지나다닐 정도의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학교를 바라보는 동네에 살았다. 아침이면 둘째를 데리고 일주일 동안 아이를 학교 교실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둘째는 언니가 입학식 날 앉았던 자리를 찾아 앉아도 보고 아기들이 가질 법한 호기심으로 교실을 돌아보았다. 


  학교에서는 학부모 대상의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학교에 대한 학부모들의 관심을 끄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에어로빅과 초보 컴퓨터 교육 등이 있었다. 나는 둘째와 함께 다녀도 되는지 문의했다. 다른 교육생에게 지장만 주지 않는다면 괜찮다는 승낙을 받고 컴퓨터 교육을 신청했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빈 교실을 이용하는 교육이었다. 컴퓨터 없이 책으로만 배우는 교육이었다. 둘째는 아이답지 않게 맨 뒷자리를 차지한 엄마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엄마가 책에 적어 넣는 글자들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다음 달에는 어린이날 행사에 참가할 엄마들을 대상으로 하교 후 에어로빅을 강습이 있었다. 내가 음치인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몸치인 줄은 에어로빅을 배우면서 알았다. 맨 뒷줄에 서서 강사의 몸짓을 따라 하려 안간힘을 썼다. 두 아이는 운동장 뒤 벤치에 앉아 엄마의 에어로빅을 지켜보았다. 처음 몇 동작은 단순 동작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것이어서 따라 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 일련의 동작을 연결해서 천천히 반복하는 것까지도 따라 할 만했다. 그러나 갑자기 빠른 음악이 나오고 음악에 맞춰 지금까지의 동작을 연결시키려니 두서가 없어지고 머리가 하얘졌다. 첫째가 달려왔다. 안타까움이 가득한 표정에는 ‘할 수 있다’는 격려가 가득했다. 그러나 내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첫째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게 왜 안 되느냐고, 다른 엄마들은 다 잘하는데 왜 우리 엄마만 못하느냐고 눈물을 쏟았다. 그 한 시간도 채 채우지 못하고 에어로빅을 중단했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후 조금 나는 조금 더 바빠졌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한참 전이었고 대부분의 정보는 티브이나 신문을 통해 접했다. 신문의 문화면을 뒤져 각종 전시회와 도서 목록을 찾아 기록했다. 첫째는 걸리고 둘째는 업었다 걸렸다를 반복하면서 각종 전시회나 강습소를 기웃거렸다. 그중 스키타이 황금전은 첫째가 지금도 가끔 입에 올릴 만큼 기억이 선명한 겨울철 전시회였다. 둘째에게는 너무 먼 기억이라 기시감 정도로 남아 있지 않을까 싶긴 하다. 관람 중에 우리 역시 이 세상에 오기 전에는 저런 황금관을 쓰고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딸과 주고받았다. 내 만족이 더 컸을지도 모를 전시회였다.    


       

16. 떠드는 사람 칠판에 적기     


  입학 2개월째. 대부분의 아이들과 다름없이 아이의 시험지도 빨간 동그라미가 수북했다. 선생님이 오늘은 무엇을 하라 하셨고 오늘은 또 어떤 일을 부탁하셨으며... 아이는 학교생활을 엄마에게 털어놓는 일이 무한 즐거워 보였다. 아이의 입학과 함께 새로 마련한 책상에서 아이는 조잘거리면서 숙제를 하거나 피아노 학원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둘째는 바빠진 언니에게 놀아달라고 조르기도 했지만 대체로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덩달아 신이 난 듯 웃어댔다.


  “엄마 엄마, 오늘은 선생님이 나한테 선생님 구두 좀 교무실에 갖다 놓아주겠느냐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갖다 놓았니?”

  “네. 그런데 희진이가 저도 같이 가고 싶대서 같이 갔어요,”

  “어머나, 우리 깨랑이 힘들까 봐 같이 가쟀나 보네, 고마워라.”

  “맞아요. 희진이 한 짝, 나 한 짝, 이렇게 들고 교무실 선생님 책상 아래 놓고 왔어요.”

  “수고 많았어요, 우리 깨랑이랑 희진이 모두. 희진이는 좋은 친구구나.”

  “좋은 친군지는 잘 몰라요. 희진이는 내가 하는 것마다 다 따라 해서 조금 그래요.”

  “음, 희진이는 우리 랑이를 닮고 싶은가 보네.”

  “그런가? 그럼 좋은 친군가요? 선생님이 수고했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셨어요.”


  좋은 교사로 소문난 분이 내 아이의 초등학교 첫 담임선생님이어서 깊이 감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학교 앞에 살았기에 가끔 뵙게 되는 선생님과의 조우 또한 선생님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말씀도 차분하시고 당신이 맡은 반 아이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하시려는 마음이 말씀 속에 그대로 드러나곤 해서 더욱 감사했다. 내 아이만을 귀여워해 주시기를 바라지도 않았기에 내 아이만을 돌려세우지 않으실 분임을 확신했다. 그런데도 아이에게 당신의 구두 심부름은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물론 그뿐이었다.     


  “엄마 엄마, 오늘은 떠드는 사람 이름을 칠판에 적었어요. 그래도 처음부터 적은 건 아니고 떠들지 말라고 몇 번 경고를 준 다음에 적었어요.”

  “그래, 우리 깨랑이 수고했네. 그래서 아이들이 많이 조용해졌나요?”

  “조금 조용했다가 금세 다시 시끄러워졌어요.”

  “다른 아이들도 떠드는 아이들 이름 적곤 하니?”

  “네. 지성이도 가끔 해요. 제가 더 많이 하지만요.”

  “그래. 지성이가 떠드는 애 이름 적을 때 우리 랑이는 떠들지 않니?”

  “네, 난 항상 안 떠들어요.”


  천진난만은 아이들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다. 이런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부분 또한 담임선생님은 예전 당신이 자라던 시절의 교육을 그대로 답습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담임선생님께 찾아가 이러저러한 것을 내 아이에게 시키지 말아 달라고 요구할 만큼 내가 대차고 똑 부러진 엄마는 아니었다. 그런다 할지라도 이후 내 아이가 혹시라도 받게 될 불이익을 먼저 염려하는 겁쟁이였다. 나는 우리 엄마가 그러셨듯 선생님께 아이를 맡겼으니 지켜보는 쪽이었다. 그렇게 지켜보면서 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면 큰 행운이라 믿었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과 행동을 수정할 뿐 다른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않는 엄마들 중 하나였다. 아이들 기준에 떠드는 행동이란 지나치게 개인적인 것일 수 있다. 아이에게만은 속마음을 털어놓기로 했다. 평소 집단생활 규범을 잘 지키는 아이에게는 학급의 반 이상이 떠드는 아이로 보이지 않을까 염려되어서였다. 

  “딸, 앞으로는 앞에 나와 떠드는 사람 이름 적을 때 좀 봐주면 어떨까요?”

  “왜요?‘

  “초등학교 1학년은 좀 떠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엄마는 우리 딸도 좀 떠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해. 칠판에 떠든 사람이라고 이름 한번 적힌다고 해서 그게 뭐 큰 문제도 아니고. 우리 깨랑이가 떠드는 사람 이름 적는 날은 좀 시끄러워도 경고만 몇 번 더 주고 끝냈으면 좋겠어서.”

  “.....”


  아이는 알아들었으나 못 알아듣겠다는 듯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 같은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교실을 마구 뛰어다닌 딱 한 명만 이름을 적었다고 알려주었다.           



17. 엄마, 상구가 때렸어요     


  학교 폭력이라는 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우리 아이가 초등학생이던 시기에는 이런 단어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어디든 폭력은 난무하고 있었고 학교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학생들이 학교 폭력을 경험해 봤을 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학교 폭력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라는 말의 그릇에 담겨 있어 흘러넘칠 때까지는 알아챌 수 없다. 일단 넘치기 시작하면 사고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기도 한다.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가 폭력을 당할 만큼의 큰 잘못을 저지른 경우는 드물다. 눈이 옆으로 많이 길고 가늘어서 바로 보아도 흘기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도 있다. 그게 여러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발길질당하고 머리카락을 뜯길 일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초등학교 입학 두 달 무렵 햇살 따사로운 어느 오후였다. 아이가 집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치는 시늉을 하며 울먹였다.

  "엄마, 내 짝꿍 상구가 태권도로 내 가슴을 또 이렇게 쳤어요. 아파요."

  점심 준비를 하다 말고 서둘러 둘째에게 외출 준비를 시키며 아이와는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어제는 선생님 심부름 후에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짝꿍이 선생님 눈치를 봐 가며 아이를 가격했다고 했다. 선생님께 알려서 주의를 받긴 했으나 오늘은 태권도 맛 좀 보라며 또 가슴을 쳤다는 것이다. 엄마에게 말하기 전에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한 점은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친구도 많고 밝고 선선한 아이에게는 늘 주변 친구들 배려하며 지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내 아이에게 조심을 시켜도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말짱 헛일이다. 연락망을 뒤쟈 아이의 짝꿍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짝꿍 엄마가 반갑게 받았다.

  "저 깨랑이 엄마인데 상구 어머니, 잠시 뵙고 싶은데 시간 괜찮을까요?"

  "네, 그럼요."     

  내 경험을 통해서도 그랬지만 이 날도 같은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어른이 하자는 대로 결과에 대한 예측 없이 따라가곤 한다. 내 아이들도 엄마가 가자니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아무런 표현 없이 따라나섰다.


  "우리 지금 깨랑이 짝꿍 집에 놀러 가는 거야."  

아이들은 손을 잡고 즐거운 듯 가볍게 걸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가볍지만은 않았다. 내 아이와 그 짝꿍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짝꿍의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슈퍼에 들러 그 슈퍼에서 파는 가장 비싼 아이스크림을 샀다. 

  상구는 엄마와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다퉜나 싶게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즐거웠다. 조심스럽게 상구 엄마에게 상구가 우리 아이에게 했던 일련의 일들을 얘기했다. 상구 엄마께서 도와주셔야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도움도 청했다. 상구 엄마는 이야기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상구 엄마가 말했다.


  "어머나, 죄송해요. 얘가 가끔 저도 한 방씩 먹여요. 제가 가슴을 쥐고 엎드려 있을 때도 있어요. 남자아이인 데다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배워가지고 깡마른 주먹이 얼마나 센지 몰라요."

  그러면서 깨랑을 안아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다시는 상구가 괴롭히지 못하게 주의를 줄 테니까 걱정 말라고 다독였다. 더불에 내게도 거듭 사과했다. 그 진심이 눈에 보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상구에게도 깨랑이와 내게 사과하도록 했다. 상구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거부감 없이 사과했다. 내친김에 용기를 내서 상구에게 다짐을 받았다. 

  "상구야, 오늘 우리 깨랑이에게 사과하고 아줌마 마음도 받아 줘서 고마워. 상구가 누구한테 맞고 오면 상구 엄마도 마음이 많이 아플 거야. 그러니 상구야, 넌 태권도도 잘하니까 부탁 하나 할게. 앞으로 누가 깨랑이 건드리면 점잖게 타일러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태권도에서 배운 실력은 안 보여줘도 되겠지? 아줌마가 우리 상구 믿어도 될까?"

  “네, 아줌마. 깨랑아, 앞으로 나만 믿어.”     


  상구 엄마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깡마른 여덟 살 아이가 이날처럼 듬직해 보인 날도 없었다. 다음날부터 상구는 깨랑의 가장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었다. 이후로 상구가 다른 친구를 괴롭힌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다. 상구는 적어도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할 만큼 비뚤어질 아이는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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