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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Oct 30. 2022

4. 엄마가 시인이 되고 싶었다면

12. 깨랑이 동작이 아른거려요   

  

  초등학교 입학을 한 달 여 앞둔 시기였다. 남편의 발령지 근처로 거주지를 옮겼다. 차를 이용하지 않고는 오갈 수 없게 된 아이의 유치원은 날씨가 추워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되었다. 졸업식 때만 참석하기로 하고 이사한 집 근처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집에서 1분 정도 거리에 있던 사설 미술학원은 미혼의 여자 교사가 보조 교사 없이 아이들과 운영하고 있었다.


  미술학원에 나간 지 사흘째 되는 날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힐 일이 발생했다. 아이는 팔꿈치 성장판을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팔꿈치에 길게 남을 수술 자국도 문제였지만 성장 후 팔이 안쪽으로 굽을 수도 있다는 진단 결과는 세상이 무너진다는 말이니 다름없었다. 친정 부모님은 물론 양가 형제들까지 병원으로 달려왔다.      

  미술학원 교사도 억울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등록 사흘밖에 안 된 아이가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는 소문은 동네에 금세 퍼질 것이었다. 미술학원을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 미혼인 교사의 입장도 이해하려 애썼다. 문제는 교사의 태도였다. 

  “병원비는 다 내 드릴게요. 그리고 병문안도 다녀왔잖아요.”


  입원해 있는 아이를 보러 잠시 다녀간 그녀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소리였다. 그녀의 눈에는 내 아이가 단지 자신의 돈벌이 수단의 일부에 불과했고, 그 돈벌이 수단인 아이가 다쳤으니 들어간 돈만 내면 된다는 말투였다.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아 아이 퇴원 후 교사를 집으로 불렀다.

  “사흘 제자는 제자 아닌가 보죠? 적어도 아이 상태는 어떤지부터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도리 아닌가요? 얼마 있으면 결혼하신다면서요? 선생님 아이가 이렇게 다쳤을 때 선생님은 상대 교사가 선생님처럼 대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아이들 쉬는 시간에 옆 아이가 우리 아이를 밀쳐서 이런 일이 생긴 일이라면서요. 집이 코앞인데 왜 즉시 내게 알리지 않았나요? 병원비는 다 내준다고요? 당연하죠. ‘병문안 다녀왔잖아요?’ 병원비 내주고 병문안도 다녀왔으니 할 일 다 했다는 뜻인가요?”


  교사가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한 번 일어난 분노가 가라앉기에는 교사의 말은 곱씹을수록 한 마디로 재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도리란 게 병원비 내주고 얼굴 삐쭉 내밀면 되는 건가요? 내 아이가 감내하고 있고 앞으로도 감내해야 할 고통을 손톱만큼이라도 생각해 봤나요? 어떻게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생활하겠다고 어머니들 앞에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지 뻔뻔한 사람이군요. 나는 아직 병원비 내 달라는 말 한 적 없습니다. 왜 설레발입니까? 더구나 흉터는 성장할 떼까지 달고 다녀야 할 훈장이 될 테고 무엇보다 성장판을 다쳐 팔이 안쪽으로 굽을 수도 있다는 말 못 들었습니까? 팔이 정상적 기능을 회복하지 못할 수도 수도 있다는데 교사라는 사람 입에서 어떻게 하면 그 따위 말이 나올 수 있죠?”


  교사는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렸다. 얼마 안 있어 결혼을 하고 어쩌고 등등. 그녀의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겨울 한 달 여 동안 아이도 나도 힘들지 않게 보낼 것에만 초점을 맞춘 데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 미술학원을 선택한 내 잘못이었다. 힘들더라도 둘째를 업고라도 버스를 타고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까지 데리고 다녔어야 했다.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은 살아가는 동안 어디서든 불쑥 튀어나올 수 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 듯 필연의 가면을 쓴 우연인 듯 조우하게 되는 사건들은 늘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른의 선택에 따라가다 팔꿈치 성장판까지 다쳤다.      


  유치원 졸업식에 쓸 사진을 찍기 위해 유치원에 들렀다. 팔에 깁스를 한 상태로 졸업식 사진을 찍었다. 키 작은 아이의 기다란 목이 깁스한 위에 입은 졸업식 가운 속에 묻혔다. 유치원 담임선생님의 말씀은 두고두고 내 귀를 울리는 말이 되었다.

  “이러이러한 동작을 할 때면 늘 깨랑이가 아른거려요. 많이 아쉽구요. 물론 다른 아이들이 그 동작을 못한다는 뜻은 아니구요, 깨랑이라면 조금 달랐을 거라는 아쉬움이죠. 어서 빨리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13. 착한 어린이상     


  어버이날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엄마, 지성이가 착한 어린이상 받는대요. 걘 하나도 안 착한데. 맨날 애들 때리고 놀려먹고 여자애들 놀고 있으면 훼방 놓고.”

  “오, 그래. 지성이가 착한 어린이상 받게 됐구나. 그건 말이야......”

  지성이는 아이의 피아노 학원 선생님 아들이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인에 차림새도 밝고 화려하여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주변에서는 내 아이가 엄마보다는 피아노 선생님과 더 닮았다는 말들을 하곤 했다. 그녀의 남편도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여느 다른 아이들 가정에 비해 경제적으로 많은 여유를 누리고 사는 듯 보였다. 실제로 그녀는 학교 육성회장도 맡고 있었고 학교 행사 시 필요 비용을 선뜻 투척하는 통 큰 여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는 당시 학교에서 있었던 지방의회 의원 선거 유세를 보면서 후에 그녀도 저런 자리에 나서지 않을까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깨랑아, 그건 말이야. 내일모레가 어버이날이잖니. 지성이가 우리 랑이에게도 짓궂은 짓을 많이 하나 보네. 그런데 랑아. 지성이는 짓궂을지 몰라도 지성이 엄마가 착한 일을 참 많이 하신대. 매일 아침 등굣길에 밟고 다니는 운동장 가장자리 붉은 보도블록 말야, 그것도 지성이 엄마가 깔아주셨대. 비 오면 운동장이 질척거려서 아이들 걸어 다니기 힘들다고. 깨랑이 엄마가 알지 못하는 착한 일도 많이 하고 계실 거야. 어버이날 학교에서 지성이 어머니께 감사드리고 싶은데 학교는 아이들이 주인이잖니. 지성이 어머니께 직접 상을 드릴 순 없으니까 지성이를 통해 어머니께 고마움을 전하려는 게 아닐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엄마 생각엔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정확한 포인트를 짚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가 더는 같은 의문을 품지는 않았는지, 혹은 의문을 품었더라도 엄마의 답변을 상기하며 삶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삶의 이치를 터득했는지 아이에게 물어본 적은 없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나름대로 정립되던 시기, 지기 싫어하는 아이들의 특성상 내 아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엄마도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엄마였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는 않은지 미안하기도 했다.     


      

14. 엄마가 시인이 되고 싶었다면제가 커서 시를 쓰겠습니다     


  둘째 출산과 함께 직장 생활을 접기로 마음을 굳혔다. 첫 아이 출산으로부터 5년이 지난 후였지만 여성의 결혼과 출산은 직장 생활에 큰 걸림돌이라는 의식이 완전히 접히기에는 시기상조인 때였다. 친정어머니 또한 많이 연로하셔서 아이 둘의 육아를 맡기기에는 무리이기도 했다. 둘째 출산 후 친정과는 거리가 꽤 있는 남편 직장 근처로 이사까지 하게 되었다. 특별한 의지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친정이란 언제나 내가 기댈 수 있는 최고의 안식처다.


  우울이 찾아왔다. 여성의 자기실현이 멀어진 것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남편의 공무원 월급만으로 네 식구가 살아가기에는 감당해야 할 경제적인 문제가 첩첩산중이었다. 편집 중이던 책이 내 퇴사 후 두 달이나 늦게 출간되었다는 소식 역시 내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출근하는 남편을 붙잡고 자주 호소했다. ‘나 죽을 것 같아.’ 남편은 힘들어하는 나를 한참 안아주며 늘 같은 말로 위로했다. ‘괜찮아, 곧 괜찮아질 거야.’ 내 눈에 가득한 눈물을 훔쳐 주는 남편의 속마음을 읽는 것으로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텼다.


  아이들은 하루 다르게 쑥쑥 자랐다. 그날도 남편의 출근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속눈썹 끝에 맺힌 눈물 흔적을 다 지우지 못한 채 들어왔다. 둘째에게 부모의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겼다고 생각하던 시기에서 막 벗어난 첫째가 품에 안기며 물었다. 성장판을 다친 팔의 깁스는 풀었으나 팔꿈치가 완전히 펴지기까지는 물리치료가 한참 남아 있었다. 잠시 후면 엄마와의 전쟁 같은 팔꿈치 물리치료가 시작될 터였다. 그러나 아이는 뜨겁고 아픈 물리치료보다는 엄마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엄마, 엄마 꿈은 뭐였어요?”

  “엄마 꿈?”


  아이의 물음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한 당황스러웠다. 깁스를 하고 있는 동안 많이 가늘어진 아이의 다친 팔을 쓸어내리며 아이의 말을 되뇌었다. 무엇보다 아이의 물음이 과거형이란 데서 적잖이 놀랐다. 엄마는 이미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과거형 물음 안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딱히 이루고 싶은 꿈도 없었지만 결혼이나 출산과 더불어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꿈은 처음부터 내 사전엔 없었다. 예상치 못했던 길로 접어들어 앞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내가 역겨웠다. 이런 내 속을 아이에게 들키는 건 아이에게도 내게도 못할 짓이었다. 속을 드러내지 않으려 짐짓 딴전 부리듯 대꾸했다.

  “엄마 꿈이야 뭐 우리 깨랑이들이랑 아빠랑 건강하게 잘 사는 거지.”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힘을 주어 말했다.

  “엄마, 엄마 되는 그런 꿈 말고. 내가 말하는 건 의사나 피아니스트 뭐 이런 꿈 말예요.”


  나는 요즘 남편에게뿐만 아니라 아이에게까지 어떤 큰 짐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특별한 꿈을 품었던 적도 이루지 못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 눈은 엄마가 엄마 이전의 다른 어떤 존재로 비치고 있었다. 나는 속눈썹 끝의 젖은 기운을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재빨리 소녀시절의 꿈을 떠올렸다.

  “아, 엄마가 되는 꿈 말고 다른 꿈. 그건 아마 엄마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시인이 되겠다고 아직 시를 쓰고 있었을 것 같아. 그런데 그건 왜?”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 책상을 돌아가 않은 아이가 잠시 후 4절지 갱지를 내밀었다. 거기엔 아이가 즐겨 그리는 늘씬한 여자 그림과 삐뚤빼뚤 세로로 쓴 두 줄 글이 있었다.     



     엄마, 엄마가 시를 쓰고 싶다면

     제가 커서 시인이 되겠습니다.     



  엄마는 글을 세로로 쓴다고 알고 있었던 걸까. 외할아버지가 글 쓰시는 모습을 자주 접해서일까.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나의 우울은 쉽게 나가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시인이 못 되라는 법도 없었다. 자신의 재능 없음과 노력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아이가 내미는 종이를 받아 들고 잠시 아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둘째가 다가와 함께 매달렸다. 나는 양팔에 안긴 이 아이들을 건강하고 지혜롭게 키우는 일이 내 최고의 꿈이요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하는 엄마였다. 미안하고 무안하고 민망했다. 이런 모습을 일곱 살 아이에게 들킬 정도로 어리숙한 나로부터 어떻게 빨리 탈출할 수 있을까. 

  한편 엄마 마음을 읽어준 아이에게 더할 수 없이 고마웠다. 말뿐만 아니라 글을 깨치고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상대의 마음을 읽고 헤아리며 표현하는 데 최고의 수단임을 어린 내 아이들을 통해 배우고 있었다. 이사 오기 전 각목으로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때리고 맞았던 사이가 맞나 싶을 만큼 아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사려 깊고 밝고 맑았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엄마 다운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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