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미 Oct 30. 2022

2. 그런 건 물어보는 거 아니에요

5. 그런 건 물어보는 거 아니에요     


  아이와 친정아버지는 찰떡궁합이었다. 친정아버지는 아장거리는 아이를 데리고 당신께서 가실 수 있는 어디든 다니셨다. 자주 들르시는 동네 주점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년한 딸이 늦도록 아버지 아래 있다가 시집을 가더니 냉큼 외손녀를 안겨드린 것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어느 날 퇴근 후 친정에 들렀을 때였다.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친정아버지께서 아이 자랑을 풀어놓으셨다. 아이는 할아버지 품에 찰싹 안겨 있었다. 

  “아, 글쎄 오늘 낮에 야(아이 볼에 입을 맞추시며)를 데리고 시장에 갔었다. 내 친구들이 사과도 한 개 주고 과자도 한 봉지 주면서 물었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야가 뭐라고 했는지 아냐? 한 번 맞춰 봐라.”

  아이를 바라보았다. 행여 아이가 정답을 알려주지 않을까 기대라도 하는 것처럼. 친정아버지가 알아맞혀 보라고 하실 정도면 뭔가 예사로운 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친정어머니는 그런 나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웃고만 계셨다. 

  “글쎄요, 엄마 아빠 둘 다 좋다고 했을 것 같은데요.”

  내 뜨뜻미지근한 답변에 친정아버지가 손을 가로저으셨다.  


  “틀렸다. 이 어린것이 사과와 과자 봉지를 꼭 잡고는 한다는 소리가, 내 참 꼭 누가 옆에서 시킨 것같이 대답을 하더라니까. 다들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렸다니까. 글쎄 무슨 생각이 있을까 싶은 이 어린것이 1초도 안 망설이고 대답하더라. ‘그런 건 물어보는 거 아니에요.’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지 뭐냐. 엄마가 좋다는 대답이 제일 흔하지 않냐. 좀 곤란하다 싶으면 엄마도 좋고 아빠도 좋다고도 하고. 그런데 야는 꼭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 같이 그런 건 물어보는 거 아니라고 늙수그레한 노인네들을 가르치더라니까. 놀라서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면 말 다한 거 아니냐. 정신을 차리고는 이제 돌 지난 애기가 기특하다고 사과도 한 개 더 주고 과자도 한 봉지 더 쥐어줬단다. 나도 막걸리 한 잔 더 마셨다. 우리 애기가 이쁜 답을 한 덕분에.”

  친정아버지는 아이를 또 꼭 안고 뽀뽀를 하셨다. 아이는 까르르르 넘어가도록 웃었다. 친정어머니가 한 마디 덧붙이셨다.

  “너 애기 잘 가르치고 잘 키워야겠다.”     


  집으로 돌아오며 등에 업힌 아이에게 물었다. 

  “낮에 외할아버지랑 시장에 갔었어요?”

  “네,”

  “거기서 외할아버지 친구 분들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하부지 친구가 사과 주면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고 물었어요. 또 과자 주면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고 물었어요.”

  “그랬구나. 그래서 랑이는 뭐라고 대답했어요?”

  “엄마, 엄마 아빠는 그러는 거 아니잖아. ”

  “응?”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 그러는 거 아니잖아.”

  “와 진짜 그렇네. 좋아하고 언 좋아하고 할 수가 없지.”

  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 건 물어보는 거 아니지, 엄마? 엄마, 내 말이 맞지?”

  “그럼, 당연하지. 우리 랑이 말이 맞네. 그런데 랑이는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 엄마도 모르고 있었는데.”

  “생각했지, 빨리.”

  아이가 검지로 내 머리를 콕 누르며 대답했다. 엄마의 강한 긍정에 아이는 기분이 더 좋은 듯했다. 꼭 잡고 있던 내 어깨에 힘을 더 주며 등 뒤에서 팔짝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드라마 ‘토지(土地)’를 시작하면 등장하는 자막 한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불렀다. ‘토지 한다, 토지.’ ‘하부지, 하무니. 토지 해요 토지.’ 친정 식구들은 아이가 벌써 한자를 안다고 놀라워했다. 아이는 드라마 시작을 알리는 주제가와 함께 토지라는 자막이 뜨면 음악과 이미지로 토지라는 한자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나이엔 다 그렇다는 내 말은 믿지 않았다. 친정에서 아이는 무조건 천재였다. 

  언젠가 아장아장 걷는 둘째와도 같은 경험을 했다. 방금 텔레비전에서 KIA라는 차 광고를 보고 나왔을 때였다. 우리 곁으로 KIA 로고를 새긴 트럭이 지나갔다. 둘째는 ‘기아, 기아.’ 하며 트럭 뒤의 글자를 가리켰다. 둘째 역시 글자의 이미지로 KIA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정아버지께서는 젊은 날 저녁이면 동네 청년들을 모아 놓고 글을 가르치셨다. 종일 일하고 돌아와 공부방에 앉은 오빠들은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그런 오빠들을 보시며 대여섯 살 난 당신 딸 나를 보라고 오빠들을 격려하곤 하셨다. 부모란 자기 자식은 모두 천재인 줄 안다. 자식을 천재로 보는 눈을 씻는 일 또한 부모가 할 일이다.          



6. 둘리 둘리     


  친정에서는 이미 소동이 벌어져 있었다. 나가 놀던 아이가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나고 깜깜한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딸의 귀가 전에 아이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숨이 턱에 닿도록 찾아다닌 친정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심장뿐이겠는가, 온몸에 불을 켜고 찾았을 것이다. 첫 돌을 넘기고 두 돌은 아직 맞이하기 전인 9월 즈음의 일이었다. 

  “골목골목 안 다닌 골목이 없는데 아무리 불러도 없다.”

  나를 보고 더 낙심하신 친정아버지가 말 그대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다시 친정어머니와 아버지, 귀가한 동생들까지 모두 나서서 동네 골목을 누비며 아이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한 바퀴 정신없이 동네를 돌고 친정으로 돌아왔을 때는 남편도 도착해 있었다. 이야기를 대강 전해 들은 남편은 서둘러 서울역으로 출발했다. 당시는 서울역이 지방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지방으로 나가는 모든 길의 길목이었다. 아이가 납치되었다면 서울역을 통해 빠져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남편의 추측이었다.      


  그때 동생이 제안했다. 

  “누나, 동사무소에 가보자. 방송 좀 해 달라고.”

  동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사무소(주민자치센터)를 향해 달렸다. 당직 중인 동사무소 직원은 흔쾌히 방송을 시작했다.

  “깨랑 어린이, 깨랑 어린이. 지금 집에서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가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세요. 혹시 깨랑 어린이를 보호하고 계신 댁에서는 어린이가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아이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즐겁고 해맑은 표정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 돌아왔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안도의 한숨 소리가 구불구불한 전화선을 따라 흘러나왔다. 가족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디 있었어요, 깨랑이?”

  “하얀이네 있었어요. 둘리 봤어요.”

  아이는 동그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아쉬움 없이 놀았다는 듯 긴 숨까지 토해내며 대답했다.

  “엄마가 랑이 부르는 소리 못 들었어요?”

  “랑이 불렀어요? 못 들었어요. 하얀이랑 같이 춤췄어요.”

  아이는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하얀이네 엄마가 둘리 끝났으니까 오늘은 집에 가서 자고 다음에 또 오라고 했어요.”


  하얀이 엄마 말로는 동사무소의 방송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하얀이와 둘이서 둘리를 어찌나 재미있게 보는지 집에 가야지 소리가 안 나오더라고 했다. 저녁까지 먹이고 둘리가 끝나서야 돌려보냈다며 미안해했다. 그날 아이에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났더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오늘 같은 일상이란 꿈도 꿀 수 없었으리라.



7. 내일 사 주세요     


  아이는 서너 살 이전부터 갖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리고 그 갖고 싶다는 마음을 그때도 지금도 잘 표현한다. 갖고 싶으면 동생도 주문하고 인형도 주문했다. 언제부턴가 그 주문은 내일이라는 단어와 함께했다. 


  아이는 음악 소리가 들리면 어디서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집에서는 물론 지하철에서도 중고 전축 가게 앞에서도 샘솟는 흥을 거침없이 몸으로 표현했다. 그렇다고 소리를 내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거나 자리를 정해 두고 제 흥에 겨워 몸을 흔들어댔다. 흥에 겨워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무대 위를 활보하는 음악인들처럼 말이다. 그때 아이의 앞날을 예견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할 때가 많다.  


  아이가 서너 살 무렵의 일이다. 퇴근 후 친정에 들러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요즘은 사라진 전축 수리점 앞을 지날 때였다. 

  전축 수리점에서는 마침 당시 유행하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하지는 않다. 아이는 그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전축 수리점 앞에서 춤을 추었다. 분홍 코트에 달린 분홍 모자가 아이를 따라 흥겹게 춤을 추었다. 행인들은 아이를 향해 빙그레 웃어주거나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갔다. 나는 그저 아이의 몸짓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면 되었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고 아이의 춤도 끝이 났다. 다음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어서 이 자리를 떠야 한다. 아이를 씻기고 잠을 재운 후 나의 하루도 마무리를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려는데 아이가 주문했다. 

  "엄마, 내일 저거 사 주세요."

  "응?"

  "저거. 노래 나오는 거."

  "음, 그거 우리 집에도 있는데."

  "우리 집에 있어요?" 

  집자는 시긴 외에는 대부분 외갓집에서 지내는 아이가 우리 집엔 전축이 없는 줄로 아는 것도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내일 사 주겠다고 답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내가 아니라면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가 스스로 내일 사 달라고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엄마가 지금 당장 사 주기 곤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이 먼저 ‘내일’이라고 시간을 정했던 것이다. 내일이란 아이에게는 언젠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갖게 되는 그런 날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내일 사 주겠다고 약속하고 잊어버린 적은 없는지 지난 시간을 훑었다. 


  여유 있게 시작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다. 전세부터 시작했고 거기서 빨리 벗어나고자 맞벌이는 물론이고 절약에 절약을 거듭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첫째는 말문이 트일 무렵부터 엄마와 함께하지 못하는 일상이 내내 아쉬워 ‘엄마, 회사 안 가면 안 돼요?’ ‘엄마 일찍 오세요.’ 등으로 자신이 얼마나 엄마를 기다리고 사랑하는지 끊임없이 상기시키곤 했다. ‘내일 사 줄게.’는 처음엔 단순히 아이의 시도 때도 없는 요청을 무마하기 위해 내 입에서 절로 나온 말이었을 수 있다. 다음에는 내가 먼저 아이와 타협했을 것이다. ‘그래, 우리 랑이 ** 갖고 싶댔지? 그거 사려면 엄마도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야겠지?’ 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수단으로 엄마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희망을 갖고 기분 좋게 엄마를 배웅하곤 했다. 아이는 그 말을 깊이 새겼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엄마, 나 저거 사 주세요.’는 '엄마, 저거 내일 사주세요'로, 다시  ‘엄마, 돈 많이 벌어서 저거 내일 사 주세요.’로 한 단계 더 올라섰다. 


  내일 또 내일. 우리는 미루고 싶을 때면 내일을 말한다. 경제적 여유 없이 시작한 결혼 생활에서 아이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그 내일이라는 미래가 너무 멀리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때처럼 절실했던 적도 없었다. 내일이란 하룻밤 자고 난 후의 내일만이 아닌 미래의 어느 날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는 내일이라는 말의 뜻을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이는 하룻밤 자고 나면 다음날이었던 내일이 다가와 오늘이 된다는 것을 처음엔 알지 못했다. 내일은 늘 내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차차 그 내일이란 한 밤 자고 난 다음날이 아닐 수도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 순간 아이는 음악이 없어도 몸을 흔들며 즐거워했다. 그래서인지 갖고 싶었지만 아직 갖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해 아이는 성인이 된 오늘까지도 여전히 내일이라는 말을 믿고 있는 듯 보일 때가 많다. 원할 때 바로바로 충족시켜 주지 못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유를 누리지 못한 이 시기가 아이에게는 내내 깊이 모를 상처가 되지는 않았는지 되짚어 볼 때가 많다.          



8. 불 켜요엄마 오게     


  친정 부모님은 절약이 몸에 밴 세대의 전형이다. 어렸을 때는 호롱불 아래서 해진 옷이나 양말을 꿰매는 어머니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다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어머니는 필라멘트가 나가 못 쓰게 된 둥근 백열전구에 양말을 끼워 넣고 올이 나간 양말 코를 잡아 꿰매곤 했다. 가끔 전깃불이 나갈 때를 대비해 양초와 호롱은 늘 집안의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해가 솟아오르기 전에 집안의 전등은 모두 껐다. 집이 크지도 않았으니 몇 걸음이면 완전 소등이 가능했다. 아침이 오기까지 집안 분위기는 어둠과 여명 사이를 오락가락 일이 잦았다. 우리 형제들은 그런 부모님에 익숙해져 있었다. 전기가 나간 날 촛불 아래서 책을 읽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때 내 몸에도 절약이 스몄다. 필요 없이 켜진 등과 한두 방울 떨어지는 물도 반드시 잠가야 마음이 편하다. 절약은 오랜 기간에 걸쳐 습득하는 교육이다.


  이런 친정에 아이가 머물게 되면서 적어도 전깃불에 대해서만큼은 제시간에 소등할 수 없게 되었다. 아이는 한낮에도 불을 켜라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졸랐다.

  “하부지, 하무니. 불 불.”

  “아가, 이렇게 환한데 이제 불 꺼야지. 이거 켜 두면 하부지 하무니 전기세 많이 내야 해.”

  “아아, 불 켜요. 엄마 오게 뷸 켜요.”  

  시간 개념이 확립되기 전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무리 시곗바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저렇게 설명해도 통하지 않았다. 엄마는 불을 켰을 때 돌아온다는 것만이 확실할 뿐이었다. 친정 부모님은 아이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뵐 수 없는 분들, 다시 한번 마음의 감사가 닿기를 바랄 뿐이다.     

이전 01화 1. 엄마 자격증이 있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