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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Oct 30. 2022

1. 엄마 자격증이 있다면

머리말     



  오랜만에 묵은 짐을 정리했습니다. 30년 넘게 봉해져 있던 상자들이 가을 햇살 아래 속을 드러냅니다. 딸들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이 운동회 날 계주 선수들처럼 달려옵니다. 상품은 일등부터 꼴찌까지 다 받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하고 풍성합니다. 그림일기와 스케치북, 무슨 대회에서 받은 상장과 삐뚤빼뚤 쓴 일기장과 안내장, 이 한 장만은 간직하고 싶었던 시험지까지 저마다 선수들이 집어 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시절로부터 훌쩍 자라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딸들에게 보낼 택배 상자에 물건들을 담습니다. 오래 엄마와 함께했던 딸들과의 추억이 오래 딸들과 함께할 엄마와의 추억으로 차곡차곡 쌓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라는 엄마의 마음을 갈피마다 꽂습니다. 마지막으로 알림장이 남았습니다. 초등학교라는 인생의 첫 계단에서 하루하루 성실한 안내자였던 고아운 상품입니다. 


  두 딸에게 삶의 안내자로 살았음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엄마의 가을은 그런가 봅니다. 삶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통합하는 안내 역할을 시대를 더 잘 읽고 인도할 주자에게 건네려 합니다. 세상이 달라졌으니까요. 다만 변하는 세상에서도 변하면 안 될 기본이 있습니다. 딸들이 살아가는 동안 알림장을 정독하며 준비하던 시절을 잊지 않는다면 인생의 어떤 공부가 즐겁지 않고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울고 웃으며 정리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마음으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딸들의 이름은 물론 친구들 이름은 실제 이름이 아님을 밝혀둡니다.

   



1. IQ, EQ, MQ와 엘리트     


  나는 시험을 치르고 중학교에 입학한 세대다. 또한 대학은 본고사를 치르기 위해 기본적으로 예비고사부터 치러야 했던 세대다. 서울대에 갈 실력에는 절대 못 미침에도 불구하고 늘 열심히 공부했다. 어려서부터 시험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습관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자라던 시대와 내가 딸을 키우는 시대는 특히 교육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한 가지만 잘해도 성공한다는 말이 유행 아닌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엄마들은 물론 아이들의 의식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나는 딸들이 한 가지만이 아닌 여러 가지를 다 잘하기를 바랐다. 사람이 한 가지만 잘해도 성공한다는 말속에는 다 잘하면 더 좋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지 않은가. 

   나는 엘리트를 좋아한다. 엘리트가 아닌 까닭이다. 딸들이 건강한 신체에 공부는 물론 심성까지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괜찮은 엘리트 대열에 들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자라던 시기에는 대학을 졸업하면 엘리트라 여겼을 정도로 대학 입학이 쉽지 않았다. 여러 자기 이유 중에 경제적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던 시절이다. 그러나 지난 몇십 년 사이 누구나 다니고 싶으면 다닐 수 있게 된 돗이 대학이다. 따라서 엘리드가 넘쳐나는 세상에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대학을 하시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엘리트라를 좋아하고 엘리트 의식을 가진 사람도 좋아한다. 대학 다니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에서부터 지금까지 내 정신을 관통하는 엘리트는 대학 졸업이 그 기준이 아닌 인간다운 인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딸들은 공부에서 처지지는 않았다. 나 역시 코피가 터지도록 뛰어놀아도 시험 성적은 늘 괜찮아서 초등학교 월요 조회 시간이면 전교생 앞에서 학년 대표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장을 받곤 했다. 따라서 학원에 다니지 않은 딸들도 상위권 중 상위권에서 노는 것이 내게는 지극히 당연했다. 음악도 미술도 엄마에 비해서는 월등했다. 나는 마음에 드는 딸들을 두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남몰래 어깨를 으쓱하곤 했다. 딸들이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부터 당부하던 말이 있다. 배려와 공평이다. 딸들의 수준에 맞는 얘를 들어 설명해 주면 간혹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곧잘 이해했고 행동했다. 언제 어느 자리에 있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거나 공평을 잃고서는 진정한 엘리트라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배려와 공평을 잃은 인간은 겉으로는 엘리트로 보인다 할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트의 예는 수없이 많다. 그중 가장 접하기 쉬운 것이 위인전이다. 부모의 도덕성은 자녀들에게도 많은 부분이 유전된다. 딸들은 위인전을 읽으면서 특히 감동을 받은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 큰 소리로 엄마에게 읽어주기도 하고 어떤 행동은 따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성장했다.     

  나는 엘리트의 기본으로 지능지수(IQ, intelligence quotient), 감성지수(EQ, emotional quotient), 도덕성지수(MQ, moral quotient)를 중요시했다. 이 세 가지 덕목을 갖추지 않고서는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학교에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삶의 바탕이 무너져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외에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티끌일지라도 다 물려주고 싶은 것이 부모다. 딸들이 내게서 물려받고 싶은 것이 있다면 생각 속의 생각의 심연을 헤엄쳐 가서라도 구해다 주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2. 엄마 자격 없습니다     


  나는 당시의 결혼 적령기에서는 한참 벗어난 나이에 연애하고 결혼도 했다. 그러나 내가 결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나이가 차면 비슷한 또래의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아 기르고 가르치고 그 아이들을 다시 결혼이라는 틀에 앉히는 것 정도였다. 그런 무지한 상태에서라도 내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내게 딸들이 있을까 싶으면 잘한 결혼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과 함께 바로 아기가 찾아왔다. 직장생활을 접었다. 위액을 토할 정도의 심한 입덧을 거치면서 이것이 어미로구나 인정했다. 임신 7~8개월까지도 뒤태만 봐서는 아이를 가졌는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빈약한 임부 시절을 거쳐 10월 초 첫 딸을 낳았다. 친정아버지의 가호 속에 친정어머니 수발을 받으며 친정에서 삼칠일 동안 산후조리를 끝냈다. 


  산후조리를 끝내고 내 집으로 돌아간 후에 문제가 터졌다. 출산 전에는 몰랐던 집의 정체가 드러났다. 내 집은 뜨끈뜨끈한 아랫목과 외풍 없는 친정집과는 딴판이었다. 방은 넓어 좋았으나 신생아와 함께 지내기에는 넓기만 할 뿐 외풍이 상당한 한옥이었다. 산후조리를 끝낸 시기가 겨울 코앞인 11월이었던 것도 문제였다. 

  감기 기운이 있는 아기를 안고 소아과를 찾았다. 소아과 의사가 아기의 코에 관을 삽입하고 위아래로 흔들어가며 가래를 뽑았다. 석션. 겁에 질린 아기는 얼굴이 충혈되는가 싶더니 숨을 거둘 듯 울어댔다. 아기가 숨을 크게 토하고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아기 얼굴에는 붉은 주근깨가 은하수처럼 박혀 있었다. 간호사는 아기가 너무 심하게 울어 얼굴로 피가 몰려 그런 것이라며 곧 괜찮아진다고 했다. 성장 후 딸은 주근깨 소녀였다. 출생 한 달도 되기 전에 석션으로 얼굴에 생겼던 그 핏방울 흔적이 평생 남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    

 

  나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은 소아과 의사로부터 호된 주의를 받았다. 

  “엄마 자격 없습니다.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했습니까. 큰 병원으로 가세요.” 

  그 길로 소화아동병원으로 달렸다. 모세기관지염이라는 병명이 나왔다. 병이 다 나을 때까지 한 달 여 동안 방 안에 비닐집을 짓고 아이와 함께 생활하며 새벽마다 병원으로 출근해서 의사를 기다렸다. 지금처럼 따뜻한 물을 뿜는 가습기가 나오기 전이어서 가습기와 커피포트를 비닐집 안에 동시에 틀고 지냈다. 새벽이면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아이를 가슴에 안고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의 첫 환자여야만 아이가 하루라도 빨리 나을 것 같아서였다. 아무 준비 없이 아이를 덜컥 세상에 내어 놓은 내가 겪어야 할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백일이 지나자 아이는 비로소 지구의 환경에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밤낮을 바꿔 자고 깨던 수면 패턴도 바뀌면서 내 생활도 편해졌다. 힘차게 젖을 빨며 엄마와 눈을 맞추는 이 아기에게 나는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가를 곰곰 생각했다. 이후에도 아기는 자주 감기에 걸렸고 가끔은 중이염에도 시달렸다. 1950년대 중반 태생인 나는 사 남매 중 맏이이다. 

  친정어머니에 따르면 나는 동생이 생기기 전까지 어머니 마른 젖을 빨았다고 한다. 동생들이 어머니 젖을 먹고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내게 익숙한 일이었다. 어머니 뱃속에 새로운 동생이 들어설 즈음이면 젖먹이 동생에게서 젖을 뗄 때마다 마음 아파하던 어머니가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빨간 약을 젖꼭지 주변에 바르고 아픈 티를 냈다. 그래도 동생들은 기를 쓰고 어머니 젖에 매달렸다. 두 돌 혹은 두 돌 반이 되도록 어머니 젖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젖꼭지 주변에만 빨간 약을 바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1년 모유 수유를 계획했다. 그러나 7개월 모유 수유로 끝났다. 재취업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처럼 젖을 떼기 위해 힘든 과정을 거칠 여유가 없었다.

   

  

3. 7개월 모유 수유와 재취업     


  7개월 모유 수유를 마친 것만도 만족하기로 했다. 젖이 나오지 않아서 또는 직장 때문에 오유 수유 자체를 포기하는 산모들도 많았다. 아이는 친정어머니께 맡겼다.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던 시절, 바로 임신까지 하고 7개월이나마 모유 수유를 했으며 직장도 새로 잡았으니 행운이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고 좋은 성적을 입사했던 예전의 그 직장이 아닌 아주 작은 회사 같은 직종으로의 복귀였다. 

  모유 수유를 접을 연습도 없이 젖을 떼고 나니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기를 가질 계획 없이 덜컥 이이를 낳은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내게 중요한 일은 왜 꼭 무방비 상태일 때를 알아서 찾아오는가. 아이는 엄마 젖을 못 먹게 된 것보다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을 터다. 나는 불어난 젖이 옷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젖이 스스로 잦아들 때까지 불어난 가슴에 가제 수건을 두툼하게 받치고 다녀야 했다. 그 시기 나는 내게서 올라오는 젖비린내를 지금까지도 기억한다. 젖이 고여 아픈 젖을 마사지 후 짜내면 처음엔 뿌연 물이 뿜어져 나오다가 점차 뽀얀 색의 영양가 많아 보이는 젖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가 먹어야 할 소중한 젖을 억지로 짜내 버리고 있었다. 모유를 짜 모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7개월 모유 수유가 방패였다.   

 

   힌 달 반쯤 후 아이를 봐주시던 친정어머니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어린이집을 알아보았다. 당시 이용 가능한 어린이집으로는 유일한 태화관이 종로에 있었다. 직장에서 멀지 않아 이용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상담 결과는 이용 불가였다. 적어도 3세 이상으로 대소변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는 답변이었다. 결국 지방에 있는 시댁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아이는 8개월 초에 접어든 까까머리, 겨우 겨우 세 걸음까지 떼기 시작했을 때였다. 한 달여가 지날 즈음 친정어머니 건강이 회복되었다. 아이를 친정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시댁에 들렀다. 아이의 8개월이 무르익고 있었다. 아이는 텔레비전에 눈을 맞추고 있는지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었다. 까까머리였던 머리카락은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깨랑아!”

  아이는 천천히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섰다. 돌아서서 잠시 엄마를 바라보는 눈은 이미 눈물이 흐르기 직전이었다. 붉어진 눈시울과 가득 고인 눈물은 엄마 목소리와 얼굴을 잊지 않고 지냈다는 가장 큰 증거다. 커다란 두 눈 가득 고인 눈물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라 항 방울도 흘릴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지 않고 천천히 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세 걸음 째 걷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외엔 시댁에 내려오던 무렵 그대로였다. 와아, 울음이 터졌다. 품에 안긴 아이가 울음을 그쳤을 때 아이 얼굴에는 지난해 11월 소아과에서 보았던 그 핏방울 무늬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엄마를 영영 못 보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을 안고 지냈을 8개 아이의 그 여름,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서야 그리움은 홍수라는 듯 펑펑 쏟았다.

  친정 옆 동네로 이사했다. 아이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외삼촌과 이모뿐만 아니라 친정 동네 어르신들의 많은 사랑을 독차지했다.         


 

4. 내 나이 10개월내 의지대로 할래요     


  아이는 출생 후 한 달도 되기 전부터 감기 치레를 했다. 백일 전 모세기관지염을 앓은 것이 잦은 감기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엄마가 될 준비 없이 덜컥 아이를 가진 내게 근본 원인이 있음은 물론이다. 결혼 후 다시 취업하여 맡은 일은 여성백과 편집이었다. 분업화가 잘 되어 있는 요즘과는 달리 원고 수발은 물론 교정, 편집, 관련 사진이나 그림 선택까지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꿰어야 했다. 회의를 통해 나는 ‘사랑, 성, 결혼’ 파트를 맡았다.  아이러니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모유 수유까지 마친 상태에서 사랑이며 결혼, 성에 대해 공부하게 되다니 말이다. 늦었으나 더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인생에 좋은 결과든 그렇지 않은 결과든 이미 해결하고 난 문제에 아쉬움이 남는 일이 한두 가지겠는가. 나는 남편에 대해 내 몸에 대해 그리고 누구보다 아이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이해를 하는 길로 들어섰었다. 기뻐하면 되었다. 남은 길이라도 알고 간다면 나쁠 이유가 없었다.     


  출근 시간은 언제나 30초도 아쉽다. 30초면 타야 할 버스를 놓치고 다음 버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지구를 30바퀴는 돌며 현기증에 시달릴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 시간이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라면 지구를 삼천 바퀴를 돈들 어지럽거나 아까울 리 업었다.

  마로니에 공원 근처 직장까지 제시간에 출근하기 위해서는 아침 6시면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아침 식사를 아이와 함께하면 좋았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내 출근 준비에 아이 씻기고 머리 빗겨 땋고 외가 가는 길목 첫 놀이터에서 그네 30번까지 태워 주려면 1분 1초가 급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반공일이라는 토요일은 오후 1시까지 근무했으나 출근 시간과는 관계가 없었다. 


  이런 아침 아이에게 약을 먹이는 일은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시럽에 타 먹이는 약이라도 쉽지 않았으나, 그날 약은 물 담긴 수저에 개서 먹이는 가루약이었다. 억지로 약을 넘기려던 아이가 약을 토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출근 준비 시간이 지옥과 같아진다. 이런 날은 아이에 대한 내 마음과는 달리 아이 탓을 한 적도 있다. 엄마와 헤어진 순간부터 종일 엄마를 기다릴 아이보다는 당장 코앞의 출근이 걱정이었다. 약과의 사투를 벌여야 하는 아이는 아이대로 약을 점점 더 싫어할 게 뻔했다. 


  시댁에 내려가 엄마와 완전히 떨어져 지내던 한 달 동안 아이는 엄마와의 분리불안이 커져 있었다. 아이는 터지 나오려는 울음을 안간힘을 쓰며 참았다. 자신이 울음을 터뜨린다면 또 엄마와 오래 떨어져 지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아이를 더 힘들게 하고 있었다. 결국 아이가 약을 뿜었다. 아이는 토한 약에 범벅이 된 얼굴로 내 다리 아래 두 팔과 두 다리를 결박당한 채 누워 숨을 죽인 채 눈물만 흘렸다. 눈꼬리로 눈물은 흘렀다. 저 눈물이 얼마나 뜨거울지 나는 안다. 그래, 오늘 출근은 10분만 늦자. 날마다 지각은 아니지 않은가.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이 얼굴을 닦고 약봉지를 다시 뜯으며 10개월 아이에게 물었다.


  “깨랑, 약 먹어야 해. 약 먹지 않으면 우리 깨랑이 아주 아기 때처럼 매일 새벽마다 엄마가 업고 먼 데 병원에 다녀야 해. 우리 깨랑이 엄마가 다리 밑에다 깨랑이 다리와 팔을 넣고 이렇게 누르면서 코 잡고 약을 억지로 먹이는 게 마음 아프네. 계속 이렇게 누워서 억지로 먹다 토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일어나 앉아서 편하게 깨랑이가 알아서 먹을까? (엄마는 랑이가 일어나 앉아 먹으면 좋겠다.)”

  ( ) 속의 말은 아이가 답을 하지 않으면 덧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말이다. 그런데 ( ) 속에 묻어두어도 좋을 말이 되었다. 2 ~3초 정도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던 아이가 팔다리를 빼더니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엄마 손에 들려 약 숟가락을 냉큼 당겨 꿀꺽 삼켰다. 삼키는 동안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준비해 두었던 사탕을 얼른 아이 입에 물렸다.

  “하나도 안 쓰다.” 

  아이가 혀 짧은 소리로 스스로 대견하다는 듯 으쓱하며 말했다. 엄마가 보는 앞에서 깜찍하게 던진 첫 거짓말이었다.     


  친정으로 향하는 길목 첫 놀이터에서 어김없이 그네를 태워 주었다. 출근 시간이 임박했으나 아이에게 줄 상을 빼먹어서는 안 될 일이다.

  “오늘은 우리 깨랑이가 일어나 앉아서 스스로 약을 먹어서 엄마 출근 시간이 이만큼 남았네. 그네 스무 번은 더 태워줘도 되겠다. 스무 번 더 타자, 어때, 괜찮지?”

  아이는 으쓱해하며 고개를 끄게 끄덕였다. 시간 여유는 없었으나 아이는 분명한 보상을 받을 만한 굉장한 결정을 했고 또 행동으로 옮겼다. 어려운 일이라도 스스로 알아서 하고 나면 뿌듯함은 알아서 따라온다는 것, 즐거운 그네 타기가 스무 번씩이나 늘어난다는 것, 동시에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 등, 아이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몸으로 마음으로 기억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아이는 어떤 일에나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해서 성과가 좋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경우 그 결과가 훨씬 좋았음은 물론이다. 10개월 아이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긍지와 함께 긍정적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태도가 프로그램되어 있음을 알게 된 날이었다. 엄마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는 게 아니라 아이가 엄마의 눈높이에 맞춰주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는 경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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