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코를 물다
“깨랑, 친구랑 잘 놀았어요?”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울먹거릴 뿐이었다.
“친구가 우리 랑이 맘에 들지 않았구나. 그게 뭘까? 엄마가 랑이 마음 진짜 진짜 알고 싶은데.”
그래도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가 함께 놀던 친구의 코를 물어 코와 인중 사이에서 피가 났다고 했다. 언젠가 둘리에 정신이 팔려 함께 춤을 추며 노느라 집에 돌아오지 않아 애를 태우게 했던 그 친구 하얀이 코를 말이다. 친정 부모님은 이미 사과를 하셨지만 내 귀가를 기다리고 계셨단다. 엄마가 백배 사과를 해야 한다는 지당한 말씀이었다. 내가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아이는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몇 가닥씩 뭉쳐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친한 친구의 코를 피가 나도록 물 아이는 아니었다.
아이를 안고 일어서는데 아이가 눈을 떴다. 잠에서 깨 다시 엄마를 보니 서러움이 밀려오는지 또 입을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랑이, 이런 땐 우는 게 아니야. 왜 친한 친구 코를 물었는지 울지 말고 얘기해 봐요.”
끝까지 대답 없는 아이 손을 잡고 약국에 들러 상처에 바를 약을 샀다. 아이 친구와 그 부모에게 위로가 될까마는 별 다른 방법도 떠오르지 않아 과일과 과자도 샀다.
“깨랑, 하얀이가 뭐 좋아하는지 알려주세요?”
“.....”
아이는 입만 삐죽거릴 뿐이었다. 한바탕 소리 내어 울어야겠는데 소리 내어 울 만한 이유를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얀이네로 가는 길,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우리 랑이, 하얀이랑 친한 친구 맞지?”
아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렇구나. 하얀이도 우리 랑이랑 친한 거 맞겠지?”
아이는 또 고개만 크게 끄덕거렸다.
“그럼 랑이야, 친한 친구끼리 잘못한 게 있을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
아직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세 돌 전 아이에게 이런 말은 무리다.
“랑아, 하얀이 많이 아프겠지?”
“네에. 피났어요.”
이번엔 아이가 소리는 작지만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다음엔 무슨 일 있으면 엄마랑 의논하자. 더 좋은 방법을 엄마랑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다짐하듯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또 고개만 크게 끄덕였다.
하얀이 엄마 아빠 앞에 아이와 함께 앉았다. 하얀이와 하얀이 엄마 아빠께 사과하고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아이에게 말했다.
"랑이, 아줌마 아저씨께 사과드리고 하얀이에게도 사과해야지."
울먹거리며 하얀이 엄마 아빠께 사과한 아이가 천천히 하얀이 손을 잡았다.
“하얀아, 미안해. 으아앙.....”
아이는 하얀이 손을 잡고 비로소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하얀이도 함께 울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서로 다가앉으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한 아이는 친구 코를 물어서 다른 한 아이는 친구에게 코를 물려서 울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한두 달은 족히 흘렀을 때였다. 이 무렵 아이는 자주 동생을 주문했다. 할머니 옆집 동생은 동생인데도 언니가 되었다고도 했다.
“동생이 언니 됐다고 맨날 맨날 자랑해요. 나도 언니 하고 싶어요, 엄마. 나도 동생 주세요. ”
그러면서 아이가 문득 지나간 이야기를 꺼냈다.
“하얀이랑 소꿉장 하고 있는데 동생이 왔어요. 같이 놀자 그랬는데 그 동생이 우리 소꿉장을 이렇게 막 흔들어 망쳤어요. 하얀이가 동생을 때렸어요. 내가 ‘하얀아 동생 때리지 마’ 하는데도 하얀이가 동생을 이렇게 막 밀었어요. 동생이 울었어요. 그래서 내가 하얀이 코를 콱 물었어요. 머리를 이렇게 잡고.‘
아이가 자기 머리를 양손으로 잡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마음속에서 이 이야기를 정리하느라 힘들었을 아이가 그날은 울지 않고 또박또박 자초지종을 전해 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우리 깨랑이 소꿉장 망쳐서 속상한데 하얀이가 동생 밀어서 울리니까 더 속상했구나.”
“네. 내가 하얀이 코를 콱 물어서 하얀이도 울었어요. 나도 하무니 하부지한테 하얀이 코 물었다고 혼났어요. 그래서 나도 울었어요.”
“괜찮아 괜찮아. 깨랑, 엄마한테 이야기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더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었다. 아이를 안고 생각했다. 아이 입장에서는 하얀이 코라도 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미 하얀이와 그 엄마 아빠께 사과까지 했으니 새삼스럽게 하얀이네 가서 아이의 말을 전할 필요는 없었다. 이사하기 전까지 하얀이와는 둘도 없는 단짝으로 잘 지냈으니 복 받은 시기였다.
10. 동생은 이쁘지만 내 엄마예요
아이의 주문이 아니라도 둘째를 낳을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능력이 된다면 아이를 여럿 낳고도 싶었다. 딸부자든 아들 부자든 자식을 많이 낳아 잘 키워 시집 장가보내고 함께 모여 찍은 대가족 사진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당시 보건사회부 설문조사에서도 나는 아이를 많이 낳겠다고 답을 하였다. 산아제한 캠페인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설문조사지를 작성하는 나를 조사요원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 꿈은 두 딸을 낳는 데서 멈춰야 했다. 첫째 아이 때와 마찬가지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 정도의 심한 입덧 때문이었다.
드디어 둘째를 가졌다. 첫 아이 때보다 더 심한 입덧이 찾아왔다. 일어나 앉는 일은 고사하고 침을 삼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옆으로 누워 하염없이 올라오는 침을 뱉어내고 또 뱉어냈다. 12월에 나와야 할 책은 내가 담당한 책 진행이 늦어지면서 스톱 상태에 빠졌다. 며칠 쉬었으나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더위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둘째를 낳았다. 딸이었다. 둘째를 낳고 나서 초복과 중복, 말복을 맞이했고 보냈다. 소서와 대서도 둘째 낳은 후에 찾아왔다.
둘째도 딸을 낳았다고 서운해하시는 친정어머니와 약간의 불화를 겪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끼니때마다 친정어머니표 미역국을 먹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어머니표 미역국이었다. 젖은 첫 아이 때 못지않게 풍성했다. 털북숭이에 주름살투성이로 작게 태어난 아이는 일주일 만에 살이 접힐 만큼 살이 올랐다.
문제는 큰 아이의 행동이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는 대소변을 깔끔하게 가리던 아이가 우유병을 거부했다. 동생이 젖을 먹고 있으면 저는 나머지 한쪽 젖을 차지하고 품에 안겨 동생과 같이 젖을 먹었고 기저귀를 채워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그렇다고 갓 태어난 동생을 예뻐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너도 이러한 시기가 있었고 너는 이제 언니가 되었으니 동생이 자랄 때까지는 네가 조금은 참아줘야 한다고 타일렀다. 타이름에는 늘 고개를 끄덕거리고 네네 대답도 잘했으나 정작 동생이 젖을 물면 영락없이 다른 쪽 젖에 매달리는 아이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
동생을 안 봤다면 여전히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할 나이의 아이를 보며 당분간 아이가 원하는 대로 받아주기로 했다. 맏이인 나는 동생들에게 양보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언제나 그럴 수는 없었지만 내 첫 아이에게는 맏이로서 언니로서 해야 할 일을 따로 의무 짓지 않기로 다짐도 했다.
11. 약속을 어겼어요
큰 아이가 몇 번의 약속을 어긴 적이 있었다. 후에 알게 된 바로는 약속을 어겼다기보다는 그 나이 또래 어린아이들이 가진 특성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엄마가 처음인 내 눈에는 아이가 약속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까지 하는 것으로 보였다. 호된 꾸지람을 반복하다가 결국 따끔한 맛을 보지 않으면 고치지 못할 거라는 판단이 섰다. 약속을 어기거나 거짓말이 일상이 된다면 아이의 인생은 어떻게 될지 더는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어른의 생각과 판단만이 최선이라는 과신이 빚은 범죄였다.
마땅한 맷감이 눈에 띄지 않았다. 집어 든다고 집어 든 매가 이웃집 건물 보수 때 쓰고 남은 거친 각목이었다. 아이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날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여섯 살 딸이 약속에 대해 얼마나 정립돼 있는지 앞뒤 재보지 않은 엄마의 폭력이 시작되었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으나 매는 매를 불렀다. 조용히 시작한 꾸지람이 차츰 언성이 높아졌다. 언성은 점점 더 높아지고 아이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여섯 살 아이에게 혹독하게 구는지 알 수 없는 어떤 광기가 내 안에서 나를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결과가 어떤 맛인지 한 번은 맛을 봐야 알겠지 하는 마음이 송곳처럼 솟아올랐다. 손바닥 한두 대이던 얼마 전까지의 매는 매가 아니었다. 팔다리며 등이며 허벅지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팼다. 한편에선 이러다 이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밀려왔다. 아이가 공포에 질려 몸을 움츠렸을 때는 각목은 아이의 머리를 때렸다. 내 사랑하는 아이는 어디 가고 한 마리 어린 짐승처럼 매를 든 엄마 앞에서 제대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아이가 악을 썼다.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 용서해 주세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각목을 집어던졌지고 아이를 안고 울었다. 아이는 아파서 울다가 엄마의 울음에 놀라 더 울었다. 용서받을 사람은 매를 든 마녀 엄마였고 그 마녀를 용서할 사람은 아이였다. 아이의 몸에 붉은색 매 자국이 선명했다. 붉은색은 이내 연두색이나 자주색으로 변할 것이다. 광기 같은 내 안의 분노를 참지 못해 또 눈물이 났다.
결혼과 함께 나는 아이 둘을 얻었다. 아이들은 사랑스럽고 소중했으나 나는 둘째 임신과 함께 직장을 완전히 놓아야 했다. 거기서 오는 우울감으로 나는 나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 어린아이에게서 벌써부터 나를 실현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는 결코 내가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나였다. 그런데 아이가 약간 삐끗했다고 각목으로 아이 몸을 그것도 아무 데나 패고 있었다. ‘아이란 동식물처럼 어른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자주 언급하는 이 말은 나 자신의 경험일 뿐만 아니라 내 아이를 내 잣대로 재고 늘리고 자르고 때리고 얼르는 동안 경험한 결과이기도 하다.
요즘 같으면 신체적 정서적 아동학대로 경찰서에 끌려가고도 남을 폭력이었다. 아픔도 오래갔을 터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후벼 파듯 아리다. 아이는 말없이 속으로 얼마나 아픈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할 수도 없다. 이후로 아이가 엄마와의 약속을 어기거나 속이는 일은 없어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아이의 언행은 그랬다. 그러나 엄마가 어떻게 아이를 스물네 시간 동안 지켜볼 수 있을까. 이런 나는 아버지 책을 몰래 훔쳐도 보았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가? 묻고 또 물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아동 복지와 사회 복지를 배우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당시의 일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학대의 속성상 지속성은 없이 일회성으로 끝나긴 했지만 각목으로 여섯 살 아이의 몸을 닥치는 대로 패서 죽기 직전까지 갔던 사실만은 지울 수 없었다. 아이의 상처를 들춰내어 다시 아픔을 주는 건 아닌가 주저했으나 이제 고등학생이 된 아이는 별일 아이라는 듯 넘겨주었다.
“엄마가 나 잘 되라고 하신 거잖아요.”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아는 나이가 된 아이가 심플하게 엄마를 용서해 주었던 걸까? 나 편하자고 아이 앞에 무릎을 꿇는 건 아닐까? 의문을 품은 내 어깨를 아이가 감싸 안았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은 내 합리화를 정당화시키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더 적확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을 뿐이다. 무지막지한 내 폭력에도 아이가 세상에 살아남아 주었기에 더욱 감사하고 고마웠다.
한편 학대받은 아이가 학대도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이가 미래의 어느 날 당시의 기억을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준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도 그랬잖아'가 아닌 닮지 않으면 더 좋을 엄마의 어떤 부분만은 완전히 승화하기를 바란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마저 딸에게 전해지지 않기르 ㄹ바란다. 폭력이 대물림된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도 가중될 터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