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선택이 우리 가족에게 남긴것
매일 아침 나는 남편과 산책을 한다. 보타닉가든에 가서 한적하고 사람없는 아침을 우리는 걷기로 시작한다. 내가 암에 걸리고 항암치료를 하면서 바닥을 치는 체력을 붙잡기 위해 할수 있는것이 유일하게 걷기였다. 하루라도 빼먹지 않고 꾸준히 걷다보면 내 저질 체력이 웬만한 어려움은 견뎌낼 정도가 되어있었다.
오늘 아침 햇살이 가득한 호주의 겨울을 싱그럽게 느끼며 우리가 오늘 이시간에 왜 호주에 살고 있고 어쩌다가 여기 와 있는지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생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선택이다. 매순간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의해 우리의 인생은 변화되고 조금씩 그 모양을 바꾼다. 마치 매일매일 똑같은 삶처럼 느껴지고 어제와 오늘이 같다고 느끼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착각하고 있는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면 나는 어제와 오늘이 조금씩 변해서 내일이 만들어 진다는걸 알게 되었으니까.
나에겐 아이가 둘이다. 첫째딸과 둘째 아들. 남들 부러워하는 딸도 아들도 가진 엄마다. 아이들이 어릴때 나는 유난히 바쁜 엄마였고 여느 맞벌이 부부들처럼 삶을 구성하는 하루하루가 항상 분주하기만 했었다. 큰딸아이가 6학년이 되고 우리는 큰아이에게 많은 일들을 맡겼다. 첫째와 둘째는 6살 차이가 나다보니 큰아이는 늘 엄마처럼 둘째를 챙기고 집안일을 도와주었다.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오면 작은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오고 엄마 아빠가 퇴근해서 올때까지 동생을 돌보고 간식을 먹이고 집안 청소를 하는것 등등....
그런 큰아이가 어느날 나와 남편에게 유학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기전까지 우리는 그져 동생을 잘돌보고 엄마아빠를 잘 이해하는 착한 큰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이는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변화를 주고 싶었었나보다. 아이의 입에서 유학 이야기가 나와서 나와 남편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만 11세. 아직은 너무나 어리고 더구나 여자아이다. 유학이라는 생각을 왜 하게 되었을까? 뭐가 아이에게 그런 마음을 품게 만든걸까? 나와 남편은 일단은 반대를 하기로 했다. 유학은 우리 부부가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변수였다.
하지만 아이는 나와 남편을 꺾었다. 퇴근후 집에 돌아온 나와 남편앞으로 아이가 내민 서류는 영어로된 학생비자 신청 서류였고 우리 부부는 떠듬거리며 서류가 무슨 내용인지 큰제목만 읽는것도 한참이나 걸렸다.
나와 남편이 진지하게 그냥 간단히 거절할수 있는게 아니구나 하고 느낀건 아이의 눈빛도 한몫을 했다.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아니 어쩌면 굳은 결심같은 것이 단단히 아이의 눈에 심지처럼 서 있는것을 나도 남편도 보았으니 말이다.
아는 사람하나 없는 낯선 외국에 아이를 보내는것은 참 두려운 일이다. 부모중 한명이라도 따라 갈수 있다면 좋겠지만 형편상 두부부가 맟벌이로 벌어야만 겨우 유학을 보낼 형편이 되는 우리에게 그건 꿈같은 이야기다. 나와 남편이 초등학교 6학년인 큰아이에게 30키로 여행가방가득 짐을 싣고 공항에 내려준건 처음 유학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멀지 않아 이루어진 일이다. 공항에서 인사하는 아이를 보면서 참 냉정하다 싶었다. 아이는 그렇게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우리 곁을 떠났다. 호주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한 큰아이는 정기적인 전화 통화 이외의 다른 연락은 없었다. 아이에게 전화를 하면 학교 생활 잘 하고 있다는 이야기, 잘 적응하고 있다는 이야기, 낯선곳이지만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이야기, 학교선생님들이 한국과 참 다르다는 이야기 정도였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이는 그때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언어의 장벽부터 부모와 처음 떨어져 지내게 된 현실 그리고 새롭게 살게된 홈스테이집들의 다양한 문화와 음식에 적응하는것이 너무나 힘들었단다. 하지만 엄마인 나에게 내색하지 않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이가 그렇게 부모에게도 속마음을 이야기 못했던 이유는 힘들다는 아이의 말을 들으면 엄마아빠는 분명히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말할거라는걸 아이도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호주에서 6학년을 마치고 하이스쿨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부모인 우리에게 요청이 왔다. 이번엔 영주권을 따달라는 요청이었다. 그즈음 아이는 때아닌 월반을 했었다. 7학년에서 8학년 8학년에서 9학년으로 1년동안 2년을 월반해서 나와 남편을 놀래키더니 이대로 가면 대학교도 호주에서 다녀야 하는데 중고등학교의 학비와 대학교의 학비는 천지차이가 난다. 유학생으로 대학을 다니려면 한국에서 엄마 아빠는 집을 팔아야 하는 실정인걸 아이는 알았던가보다. "엄마, 영주권 좀 따주시면 안되요? 영주권이 있으면 대학교를 무료료 다닐수 있을것 같은데...." 나와남편은 아이의 요청에 난생처음으로 영주권이라는게 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모든 박람회를 찾아다니고 어떻게 자격을 갖추는건지 우리는 영주권을 받을수 있는 사람들인지 아닌지를 다양하게 검색하고 알아봤던것 같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영주권을 취득하고 아이는 호주에서 대학교와 대학원까지 공부를 하게 되었다. 아이의 말처럼 영주권을 받게 되고 아이가 시민권을 받게 되면서 호주 정부에서 모든 학비와 용돈까지 지급해줘서 아이는 문제없이 공부의 끝자락까지 달려갈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 가족의 삶의 터전이 바뀌었다. 아이가 요청했던 영주권을 받고 나는 작은 아이를 데리고 호주로 이사를 왔다. 남편은 한국에 작은 원룸을 구해 남겨두고서 말이다. 이렇게 가족은 때아닌 이별을 하고 우리는 한국에서 호주에서 서로 다른 삶을 한동안 살았다. 내나이 40이 넘어서 낯선 외국에서 언어조차 되지 않는 삶은 내 인생의 2막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큰아이는 변호사가 되었고 작은 아이는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나는 현재 암환자가 되어서 치료를 받고 있고 남편은 암환자인 아내를 돌보는 따뜻한 케어러가 되어있다. 그러나 나도 남편도 겨울이 따뜻한 호주를 사랑한다. 왜 오늘 우리가 이곳에 있고 어쩌다 온 가족이 호주에서 살고 있는지 이야기 하다보면 그때 그 결정! 그 작은 선택들이 모여모여 우리를 오늘 여기 있게 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나의 결정이 아니었다. 그건 연속적인 매일매일의 많은 생각들과 결단들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나와 남편은 또 내일을 만들 그 결정들을 오늘 이순간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