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마다 새롭게 Mar 20. 2023

인생에서 쉬어가는 페이지는?

결혼하는 아이가 나에게 가르쳐준 쉬어가는 페이지

책을 읽다 보면 각 챕터가 끝날 때마다 여백이 존재한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다음장에 마치 새롭게 시작하는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해, 혹은 글 속의 이야기들을 자연스레 단계별로 진행하기 위해 여백을 사용하기에 우리는 흔히 접하는 각 챕터 마지막장의 공백에 익숙하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각 챕터가 끝나고 쉬어가는 페이지(?) 같은 공백은 존재했었는지 가물거린다.

나에게도 인생의 굵직한 변화가 꽤 많았었고 그럴 때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인생 2막이나 인생 3막이라는 이름을 붙이곤 했었다. 이번에도 나는 인생 3막을 위해 사실 브리즈번으로 주이동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새로운 시간을 시작하기 전에 제대로 된 여분의 쉬어가는 페이지를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어떨 때는 분명히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내왔던 시간도 있었건만 아쉽게도 그건 그냥 사라지는 시간이었거나, 별 의미 없는 시간으로 내 삶에 존재했었던 것 같다. 왜냐면 내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보내버린 시간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참 아쉽다.

사실 인생에서 우리가 쉬어갈 수 있는 페이지는 몇 장이 안될 텐데 말이다.

멀리뛰기 전에 잔뜩 움츠린 개구리처럼, 혹은 하늘 위로 큰 날개를 펴서 날기 직전의 새처럼 나에게도 각각의 인생의 시간에 그런 시간이 있었는데 말이다.


큰아이가 결혼을 한다고 준비 중이다. 

예식장에서 하는 화려한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지인과 친구들과 친척들이 와서 축하해 주는 아주 의미 있을 하루를 준비하는 것도 아니다. 

큰아이가 청혼을 받고 결혼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어떤 결혼식을 꿈꾸냐고 물었다. 아이가 30살이 되다 보니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이 결혼을 했고 아이도 어김없이 그런 결혼식에 참석을 했었다. 아주 화려하게 요트를 빌려서 하거나 와이너리를 통으로 빌려서 하는 호주의 호사스러운 결혼식과 또 한국의 시청과도 같은 카운실에서 결혼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하는 소박한(?) 결혼식까지 다 참석해 본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 나는 아이가 어떤 결혼식을 선호하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아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난 화려한 결혼식 또는 사람들이 말하는 스몰웨딩을 하고 싶지 않아. 나의 결혼식은 오로지 가족들과 함께 하는 여행으로 대체하고 싶어요" 한다. 

처음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결혼하겠다는 날짜는 앞으로 10개월이나 남아있었다. 

새신랑 새신부가 될 두 사람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호주가 아니라 뉴질랜드 여행을 계획했다. 아직 우리 가족이 뉴질랜드를 가본 적이 없어서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나라였는데 그래서 그 나라를 선택했나 보다. 뉴질랜드 여행은 오직 양가부모와 직계형제자매만 참석할 수 있다. 양가집안 신랑신부 합해서 총 9명이다. 아이들은 비행기 예약을 하고 함께 머물 큰 저택을 예약하고 현지에서 필요한 차량렌트 예약까지 마쳤다. 총 6일간의 일정으로 여행은 할 것이고 그중 하루는 머무는 숙소와 가까이 있는 멋지고 고풍스러운 교회에서 결혼식을 할 예정이다. 가족들만 참석한 결혼식이 될 것이고 그 교회의 목사님 정도만 결혼식 인도를 위해 준비되어 있을 예정이다. 그런 결혼식을 생각하는 아이들이 참 대견하기도 했지만 결혼식은 두 사람만의 결정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심 걱정을 했는데, 신랑 부모님과 상견례에서 아이들의 결혼식에 대한 의견을 여쭤봤더니 아이들의 의견에 100퍼센트 따르겠다며 너무나 감사하게 말씀해 주셨다. 

호주에 달랑 우리 가족만 있는 우리 집과는 반대로 신랑 측은 호주에 모든 친인척이 다 계시다. 심지어 할머니에 사촌들까지 완전 대가족인데도 결혼식에 초청하지 못하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나는 아이들의 생각을 존중한다. 그들의 결혼식이고 그들의 첫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부모의 어떠한 도움이라도 요청한다면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말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요청이 없다. 이제는 어엿이 사회생활을 하는 경제적으로도 독립된 아이들이라 양가에 어떤 것도 요청하지를 않는다. 결혼식에 들어가는 모든 경비를 최소화하고 모든 것은 미리 예약을 해서 최대한으로 부담감을 줄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부부는 어느새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맡기고 아이들의 생각을 경청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한국에는 웨딩플래너가 있어서 결혼준비에 정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호주엔 그런 시스템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결혼식이 아니다 보니 사실 웨딩플래너가 필요한 상황은 아닌 듯싶다. 

아무튼 아이들의 결혼 날짜는 다가오고 있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아주 세밀하게 짜고 있다. 결혼식이라는 것이 엄청 중대한 일생일대의 사건일 텐데 아이들이 담담히 하나하나 처리하는 모습을 보자니 우리 때의 그 번갯불에 콩 볶듯 획하고 지나가는 하루의 이벤트성 결혼식과는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결혼식은 결혼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갖는 쉬어가는 페이지를 부모님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주일간의 결혼식 여행이 이제 몇 개월 남지 않았다. 

나 역시 딸아이를 낳고 30년을 길러온 엄마로서 이제 이렇게 쉬어가는 한 페이지를 함께 가지며 아이의 결혼생활을 손뼉 치며 응원해 줘야겠다. 

행. 복. 하. 게. 잘. 살. 렴.



작가의 이전글 이민자의 투병생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