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문자 엔지니어다

day 2-2

by 달보


내심 아내 친구의 남편은 동행하지 않길 기대했다. 한국말이 서툰 중국인이라 소통이 어려워 불편할 것 같아서였다. 야간 근무라서 아마 같이 가진 못할 거라는 아내의 말에 오류가 있다는 건, 연두색 루이비통 티셔츠를 입고 아내 친구와 함께 유모차를 끌며 걸어나오고 있는 아내 친구 남편 'D'(편의상 그의 이름 이니셜을 따서 'D'라고 하겠다)를 보고서 알았다.


우리는 '제주당'이라는 대형 카페에 갔다. 중국인이 오너인지 간판에 중국어가 커다랗게 박혀 있었다. 요즘 크고 화려한 대형 카페가 워낙 많으니 육지에서 가봤던 여느 대형 카페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땅이 넓어서 그런지 투자 규모가 다른 건지는 몰라도 제주당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층수는 두 층뿐이었지만 내부에 들어선 요소들은 다양하고 독특했다. 커다란 트랙터가 층마다 자리 잡고 있었다. 1층에는 빵공장을 연상케 하는 카운터와 정글처럼 울창한 나무와 물가가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자리한 테이블들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는 2층의 푹신한 소파 자리에 앉았다. 2층 중간쯤에는 신발을 벗고 누워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카페 내부가 너무 넓다 보니 처음엔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유모차에 타고 있는 현이가 심심할까 봐 한 바퀴 돌아보다가 발견했다. '아내 친구만 없었으면 저기로 자리를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근사한 자리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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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 아내 친구와 D. 이렇게 네 명이 앉은 테이블의 분위기는 아내 친구가 있냐 없냐에 따라 나뉘었다. 네 명 중 중국어와 한국어를 모두 능통하게 하는 사람은 아내 친구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명헌이 기저귀 좀 갈고 올게."

"언니, 여기서 갈아도 되지 않아?"


보는 사람도 없는데 유모차 위에서 기저귀를 갈아도 되지 않냐는 아내의 제안을 남몰래 응원했다. 아내 친구가 자리를 비우면 D와 우리 부부 사이의 소통은 끊길 것이고, 그에 따른 어색함은 생각만으로도 불편했다.


"아, 그래도 좀..."


결국 아내 친구는 자리를 비웠고 나와 아내 그리고 D가 남았다. 역시 어색했다. 아내와 둘이 꽁냥거리기엔 말없이 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D에게 미안했고, 한국어가 서툰 D에게 말을 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중국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D와 알 수 없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는 그나마 조금 편해졌다. 중어중문학과를 전공한 아내가 중국어를 구사할 거라 생각지 못했던 이유는, 중국어는 거의 다 까먹어서 못한다는 아내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중국 사람 같을 정도로 유창하게 중국어를 하는 아내가 새삼 멋있어 보였다.


다만 아내도 긴 대화를 이어가기엔 역부족이어서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뻘쭘한 공백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그토록 넓은 공간에 있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텁텁한 느낌이 들었다. 아내 친구가 돌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아내 친구는 오랜만에 둘이 담소 좀 나누겠다며 유모차를 끌고 창밖의 드넓은 평야로 나가버렸다. 허탈했다. 나와 D만 덩그러니 남겨지니 '망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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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갑자기 인스타그램에 낯선 아이디로부터 한 DM이 도착했다. 평소 DM 받을 일이 거의 없다보니 궁금한 마음에 바로 확인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DM을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내 앞에서 조용히 폰만 들여다보고 있던 D였다. 더 놀라운 건 DM의 내용이었다.


"작가는 대단하다."


중국어로 쓴 문장을 번역기에 돌린 듯했다. 혹시 몰라 나도 한글을 입력한 다음 전체 선택으로 범위를 지정하였더니 '번역' 기능이 있었다.


"저는 항공 엔지니어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제 주변에는 엔지니어가 거의 없거든요."


그러자 D의 답장.

작가는 문자 엔지니어다.


작가가 문자 엔지니어라니.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비록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출간하긴 했어도 여전히 누가 나를 작가라고 부르면 어색하고 부끄럽다. 아내 친구가 내 책을 여러 권 사준 건 알고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인 D까지도 나를 작가로 인식하고 있다는 게 새삼 고맙고 놀라웠다. 그는 작가라는 직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단순히 아내의 지인이라서 하는 빈말이 아니란 게 느껴졌다.


여전히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가 용기 내어 진솔한 DM을 보내준 덕분에 우리 사이의 온도는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아내와 아내 친구가 자리에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서로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번역기의 힘을 빌려 DM으로 주고받았다. 그날 난 AI 기술이 더 발전해서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실시간으로 외국인과 대화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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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가 쓴 책 :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달보의 일상이 담긴 :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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