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만난 뜻밖의 인연

day 2-3

by 달보


제주당이 워낙 초대형 카페라 내부 사진을 찍은 것만 해도 백 장이 훌쩍 넘어갔다. 그러다 잠시 후 외부 사진을 하나도 찍지 못한 게 뒤늦게 떠올랐다. 나가서 사진 좀 찍고 오겠다고 말했더니 아내 친구가 한 가지 부탁을 했다.


“D 혼자 저기서 불쌍하게 폰 만지고 있는데 좀 데리고 나가서 같이 다녀와.”

“아, 저 일단 사진부터 찍고 올게요.”


조금 전까지 DM을 주고받으며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단 둘이서 산책을 다녀오는 건 곤란할 것 같았다. 사진은 아예 찍지도 못할 게 뻔했다.


“지금 같이 나가서 찍으면 되잖아.”

“아...”


피할 구석이 없었다. 아까는 마주 앉아 있었기에 번역기를 돌려가며 DM을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같이 걸으면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그, 중국어를 1도 모르는 나. 막막했다. 카페 외부는 땅도 넓어서 한 바퀴 도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릴 터였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던 나는 그럴 때마다 외우던 주문을 속으로 되뇌었다.


‘에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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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모르겠는데 D는 자리에 앉질 않고 1층 외부 출입구 앞에 서서 혼자 폰을 만지고 있었다. 그런 D에게 성큼 다가가 손짓으로 함께 밖에 나가 걷자고 했다. 다행히 그는 내 뜻을 금세 이해하고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처음엔 나보다 더 조용하고 낯가림이 심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함께 걷기 시작하니 눈빛과 손짓을 곁들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대화 내용은 특별할 게 없었다. 한국 사람은 커피를 많이 마시고 중국 사람은 차를 즐긴다. 복잡한 상하이에 살다가 한적한 제주에 정착하니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다. 항공 엔지니어 일은 힘들다. 뭐 이런 이야기들. 처음엔 D가 말을 많이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면 내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쉼 없이 질문을 던진 것에 대한 대답을 한 것뿐이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중국인과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한국인이 웬만큼의 소통이 가능했던 게 신기했다. 그새 정이 붙었는지 카페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그와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에 셀카를 제안했다. 왠지 쑥스러워하며 거절할 가능성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D는 산책을 따라나설 때처럼 흔쾌히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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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나서면 아내 친구 가족과 헤어질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한 고깃집에서 중국의 고급 백주 ‘수정방(水井坊)’을 잔에 따라 D와 술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수정방은 아내 친구가 집에서 챙겨온 술이었다. 고깃집 사장님께 양해를 구한 뒤 따를 수 있었다.


"우리 남편이 너 마음에 들었는지 수정방을 까라고 하더라."


나는 수정방이 어떤 술인지 몰랐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 술을 꺼내자고 한 D의 제안에 아내가 놀라는 반응을 보고 얼추 그게 비싸고 좋은 술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직접 마셔보니 향이 강하고 목넘김이 부드러운데, 온 몸에 술이 퍼지는 섬뜩하면서도 따스한 기운이 여느 양주들보다 오래 가는 듯했다. 첫 모금엔 낯설고 진한 향에 당황했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중독되는 맛이었다. D와 딱히 깊은 소통을 하진 못했어도, 언어 너머의 무언가가 우리 사이를 진득하게 이어준 듯했다.


그렇게 난 제주도에서 뜻밖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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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가 쓴 책 :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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